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월간 '우리詩' 2022년 5월호의 시(3)

김창집 2022. 5. 14. 07:04

*찔레꽃

 

자본주의 - 조미희

 

냄새가 사라진 골목을 걷는 건

가방을 잃어버린 학생의 등 같다

 

수학 영역을 잘 놓친 아버지

그래도

입의 크기만큼 세상을 먹을 수는 있었지

 

즈려밟다

새들이 지붕과 지붕을 건너며 해골 같은 저녁을 부른다

골목 위로

피곤과 절망과 약간의 꿈 부스러기가 한데 섞어 번지는 앙상한

 

도시는

오늘도 어제보다 한마디 커진 손가락으로 사람의 마을을

툭 건드린다

견고한 지붕은

오늘 바람이 좀 부는군

하며 창문을 닫고 잠자리에 든다

나머지 지붕들은 밤새 지붕을 고치며 밤잠을 설친다

 

나는 슬그머니 찾아오는 아침을 목소리를 잃은 닭처럼 맞이한다

아침은 그리 반짝이지 않지만

나를 깨운다 내 부모들처럼,

그들의 뒤척임을 알고 있고

나 또한 그러하리라

 

입을 벌리고 별로 달콤하지 않은 이 세상의 시큼 텁텁한 모서리를 아침으로 먹는다

 

 

 

꽃길 강우헌

 

산벚나무가 세 시 방향을 지나자

후르르 꽃잎이 진다

 

왜 통증은 명치에 밑줄을 긋는지

 

저 눈부신 보쌈은

피가 더운 바람의 수작이다

 

지난 봄 꼬막손 바람이 아기 분 냄새를 묻혀올 때도

그녀들의 빈자리가 생겼다

 

사람들은 꽃길이라 부르고 사진을 찍지만

여자를 보낸 엄마의 길

우리 엄마 나 때문에 꽃다운 청춘이 가버린 방향이다

 

새들이 골목을 지나 연두가 펼쳐지는

여기는 카오스 속,

다음엔 어디서 스치게 될까

나의 산벚나무 당신은

 

 

가곡천 도깨비불 - 명재신

    -태백산맥 27

 

말끔하게 태워 버렸다지

깔끔하게 태우고 있다지

 

가곡천은 못 넘어올 거라고

지켜만 보았는데

 

무슨 울진 삼척 무장공비들도 아니고

저번에는 삼척을 넘어 원덕을 지나

가곡천을 뛰어넘어 오더니

 

이번에는 울진에서 시작해서

가곡천을 뛰어넘어 갔다지?

무슨 가곡천 도깨비불이 아니고서야

 

산불이 번져서 모두 타버린 집 앞에서

팔딱팔딱 뛰는 노친네 모습에

몇 날을 잠 이루지 못하는데

 

십이령골까지 쳐들어가

금강송까지도 태우려 한다니

우야꼬 우야노.

 

 

 

라싸로 가는 길 - 이중동

 

자벌레 한 마리 허공에서 뚝 떨어지네

낭창한 걸음으로 어깨선을 따라 내 몸을 더듬고 있네

 

꽁무니를 치켜들자 몸이 활처럼 휘어지네

조준 없는 화살을 숲속으로 쏘아대네

 

과육을 도려내던 날카로운 손이 화살을 피해 가네

상처 입은 성체는 아프고 칼을 잡은 손은 화려하네

비명이 죽비처럼 소리치네

 

주둥이를 치켜들자 몸은 천 길 사슬로 뻗어나네

눈금 없는 사슬이 내 그림자를 친친 휘감네

 

심장을 쿡쿡 찔러대던 세 치 혀가 사슬을 끊고 있네

혀는 장검처럼 길고 선혈은 잉크처럼 검푸르네

 

욕망의 비계 층을 핥으며 주둥이가 지나가네

한 겹씩 구워대던 열판이 범종처럼 식어가네

 

눈알의 깊이를 가늠하며 꽁무니가 뒤따르네

쇠못을 박으며 눈알들이 무간지옥으로 떨어지네

 

를 받듯 두 손을 합장하네

오목한 자궁 속으로 묵은 청춘이 들어가 눕네

 

라싸로 가는 길은 멀고 광배는 산안개 속에 흐릿하네

 

 

 

봄볕이 조심스럽게 정재원

 

하얀 눈 속

꽃망울 감싸는 손길

 

껍질 먼저 뚫고 나와

차고 따스한 바람 가늠하다가

반듯하게 꽃을 올려 놓는

그 꽃받침

 

면사포 눈부시게 씌워

행복하게 잘 살거라

살며시 손금 하나 풀어놓던 손

 

몇 방울 빗물로 촘촘히 엮이는 시간

 

폐허의 마디를 지나온, 환한 뼈

 

죽을 것 같이

수많은 무늬를 견디고

매화도 그렇게 핍니다

 

 

 

법수치 산천어 - 방순미

 

계곡 한 모퉁이를 골라

가만히 앉은 낚시꾼,

 

무얼 할까 싶어

가던 길 멈추고 보았다

 

낚시에 꿰인 잠자리 미끼

살아있는 듯 나풀댄다

 

무언가 번개같이 뛰어올라

덥석 잠자리를 잡아채어 갔다

 

순간, 용왕이 튀어 오른 듯

비단 먹빛 광채의 물고기

 

낚시꾼에 걸려든 산천어

죽을 힘 다해 허공을 친다

 

숲이 놀라

온 산 붉다

 

 

                         * 월간 우리20225월호(통권 407)에서

                                          * 사진 : 찔레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