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낮달맞이꽃 – 한희정
어쩌다가 백주대낮에 달맞이꽃 폈는가
적시를 못 찾아서 쪼그려 앉았는가
겸연쩍,
눈웃음치는 게
별 의미 없다는 듯
중심이 아니어도 힘이 되는 길은 있어
진심이면 통한다는 저 분홍 아웃사이더
늘 긍정,
스크럼 짜나 봐
한 마디씩 신났어
♧ 전갈의 노래 – 강동완
독을 품은 전갈들의 세상이다
내 입속엔 드럼을 치는 붉은 전갈이 산다
전갈의 독은 둥둥 드럼소리로 공기 중을 떠다니며 퍼져나간다
나의 독을 품은 몇 마디 말에 너는 온몸에 독이 퍼져 고사목처럼 굳어버릴 것이다
전갈의 독을 쏘인 달은 어린 애처럼 자꾸 눈을 비빈다
눈곱처럼 회색 구름들이 한쪽으로 몰려 있다
전갈이 흙을 뚫고 나뭇잎을 기어 다니면 바싹 마른 이 세상에도
붉은 비가 내릴 것이다
달빛의 주머니 속에서 어머니의 한숨처럼 어둠이 무너져 내린다
이 세상의 모든 우울한 그림자는 독이 퍼진 차가운 눈을 맞으며
벌겋게 녹이 슨 슬픔을 토해내고 있다
살얼음 위에서 아픈 그림자가 녹아내리고 있다
나뭇잎 위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어깨 위로 떨어진 전갈은 완강한 목에
뜨거운 눈물을 투여한다
독이 퍼지면 사람들의 가여린 입술은 빨간 매니큐어 바른 것처럼 붉어진다
사람들이 작았던 귀가 캥거루 귀처럼 커진다
밭에서 집으로 돌아오신 아버지는 전갈을 담은 술을 마신다
아버지는 평생 아픈 전갈처럼 사셨다
아버지의 등에는 신앙처럼 전갈문신이 그려져 있다 깊은 밤 속 어둠이
누군가의 손톱 속에서 녹아내릴 때면 문신에서 전갈들이 나와
마룻바닥을 기어 다니며 슬픈 노래를 불렀다
그대의 젖은 눈을 만지고 싶어요 따뜻한 눈물을 흘리며 잠들고 싶어요
어린 동생과 나는 전갈을 구멍가게에서 넉넉한 돈으로 바꾸기도 했다
배고플 때 향기로운 베이컨처럼 전갈을 씹어 먹었다
내 입 속에서 전갈들은 알을 까고 입 속은 전갈의 모래 무덤이 되었다
어둠과 불타는 태양을 채워 넣은 내 어린 시절의 책가방 속엔 마른 전갈들이 책갈피가 되었다
오래된 상처 자국처럼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숨겨 놓았다
짝사랑하는 옆자리의 여자 친구에게만 아름다운 전갈들을 살짝 보여 주었다
독이 퍼진 내 삶은 뜨거운 구들장 위에서 불타오르며 눈을 감는다
붉은 생채기들이 숨 가쁘게 독이 묻은 꽃가루를 묻히며 아물어간다
내 눈물 속엔 푸른 독이 있다 나의 눈은 언젠간 멀어질 것이다
전갈의 독은 겨울 숲을 날아가는 날개 달린 그리움이다
전갈들이 흙을 비집고 세상 속으로 기어 나온다 내 혀가 얼얼하다
♧ 언어 - 현택훈
아라요양병원에 누워 있는 아버지
목관에서 가래 끓은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도 감정이 있어서
언어가 되는 걸까
벌써 매화가 폈구나
아버지가 또렷한 눈동자로 말한다
옛날 무덤 관에서
손톱자국이 발견될 때가 있다고 한다
적막을 긁는, 가르랑거리는 밤
별들은
수많은 사람들의 손톱자국이구나
♧ 눈사람 – 조직형
처음부터 위태롭게 태어난 건 아니었다
전혀 바라던 자리가 아닌 곳에서
몸통으로 서 있는 불안한 직립
흔들리는 나무 위에선 잡을 게 아무것도 없구나
적요한 밤이 지나면
해가 솟는 아침이 온다는 것을 간과했다
뺨을 때리는 바람만이 너를 견디게 하는 힘
말은 입에서 생기지 않고
희망은 눈으로 보는 것도 아니다
한때 순백으로
가만가만 길을 찾던 잃어버린 발꿈치를 들고
창안을 들여다본다
네가 던져놓은 선물 꾸러미가 집집마다 쌓여갈 때
넌 나무에서 후드득 떨어지는 눈처럼 부서져 내린다
끼니도 거르며 밀고 가는 택배카트에
어지럽게 달려드는 밥풀 같은 눈송이
하루를 달려 텅 비워낸 저 짐칸에
무엇을 담아 돌아가야 하는지
젖은 주소를 읽으며 먹먹해진다
이미 내일이 와버렸다는 것도 모른 채
서서히 체온을 날리며
그 자리에서 날개를 터는 눈사람
♧ 허공의 집 - 장영춘
푸른 꿈만 꿈꾸며
살던 시절 있었지
혹한의 겨울밤을 뒤척이고 뒤척이던
인제리 자작나무숲 말갛게 고인 고요
아무리 역주행해도 불시착 허공의 집
희미한 불씨 하나 산등성이 넘어서고
발아래 잎 지고서야 보이는 파리한 얼굴
공정과 상식의 논쟁을 벌이다 뒤틀린
서로 등 맞대고 담담하고 당돌하게
허옇게 비듬을 터는
한 노인이 저기 있네
♧ 다랑쉬오름 분화구 – 조한일
가진 것 절반을 뚝
만 년 전에 내줄 때도
그마저
가차 없는
뜨거운 삶이었다지
나였음
그리 살면서
저토록 평온할까
*계간 제주작가 2022년 봄호(통권 76호)에서
* 사진 : 낮달맞이꽃
'문학의 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월간 '우리詩' 2022년 5월호의 시(3) (0) | 2022.05.14 |
---|---|
김혜천 시집 '첫 문장을 비문으로 적는다'의 시(6) (0) | 2022.05.13 |
박남준 시집 '그 아저씨네 간이 휴게실 아래'(5) (0) | 2022.05.11 |
월간 우리詩 2022년 5월호의 시(2) (0) | 2022.05.10 |
김용길 시집 '빛과 바람의 올레'의 시(2) (0) | 2022.05.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