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순 깨어지고 남김없이 씻겨져서
-오체투지
낮게 엎드리면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엎드리지 않으면 자신을 한없이 낮추어
눈높이를 맞추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귀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오체투지로 가는 길
두 눈과 두 귀 가득 들려오고 보이는 것
땅바닥이 아닙니다 아스팔트를 질주하는 바퀴 소리가 아닙니다
외면하십니까 모른 체하십니까
내 뜻이 아니었다 무엇 하나 모자람 없이 아낌없이 다 내주었으나
너희가 이렇게 만들었다 정녕 그것입니까
지리산 노고단에서 하늘에 제를 올리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생명의 눈으로 세상을 보려는
평화의 마음으로 맺히고 얽힌 삶을 껴안고 풀어내며
세상 속으로 다가가려는 사람의 이름으로
거기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뜻과 함께하여
그 염원을 드리며 바라는 모든 생명들의 마음을 감히 모시고
오체투지순례단, 산 아래 엎드려 사는 이들을 만나고 만났습니다
어둠을 만나고 빛을 만났습니다
먼 길을 떠나는 철새들을 만나고 깨알 같은 작은 풀꽃을 만났습니다
자갈길에 엎드리고 아스팔트르 기었습니다
눈 들어보면 길을 걷다 만나는 세상의 모든 것들 반갑지 않은 것 없습니다
어여쁘지 않은 것 없습니다 귀 기울여보면
그 길 위의 모든 것들 힘겹지 않은 것 없습니다
고통 받지 않는 것 없습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그 생명의 향기로 가득 차 꿈틀거리며
꽃피워지는 것이겠습니다
희망과 믿음의 꿈을 잃지 않고
푸른 두레박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는 것이겠습니다
그 꿈을 향해 한 발 한 발 혼자가 아닌
이웃과 함께 나아가는 것,
세상의 모든 생명들과 함께 나아간다는 것이겠습니다
저마다의 자리에 스스로 그러했듯
제자리에 본디 그대로 살아간다는 것이겠습니다
엎드리고 또 엎드렸습니다 만나고 또 만났습니다
더불어 살지 않으려는 마음이 전쟁과 고통을 세상에 만듭니다
함께하지 않으려는 마음들이, 나누지 않으려는 마음들이,
섬기지 않으려는 마음들이 세상을 병들게 하고 상처를 주고 있습니다
여기 오늘 한결같은 지극함으로 기도하며 엎드려 몸을 던지고
맑고 향기로운 이들의 마음과 인연이 모아지고 보태져서
이 자리 만들었습니다
낮은 곳으로 세상의 가장 낮은 곳으로
망설이지 않고 엎드려 나가며 헛되고 덧없는 것들
일순 깨어지고 남김없이 씻겨져서
더함도 덜함도 없이 나누어지지 않는 마음으로
한 점 티끌, 부끄러움 없이 다가가겠습니다
따뜻한 사랑으로 껴안을 것입니다
내딛는 한 걸음의 발자국이 세상을 변하게 한다는 것을
그 시작이라는 것을 믿고 또 믿습니다 더디고 더딜 것입니다
이 길, 생명의 기도로 떠나온 길
사람의 길을 묻고, 평화의 길을 찾아 엎드리며 가는 길
굽이굽이 어느 한순간에도 처음처럼 맨 처음 기도하던
그 첫걸음의 마음 잃지 않게 굽어살피소서
다 비워지고 간절하게 하소서
엎드려 기도하는 사람의 길이 환하게 불 밝혀지며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이 상생과 조화로 꽃피워지는 날까지
세상의 끝과 처음까지
생명과 평화의 걸음걸음 퍼지고 울려 나가는 날까지
부디 굽어살피소서
생명의 길
사람의 길
평화의 길을 찾아 떠나는 기도
오체투지순례단의 이름으로
무릎 꿇습니다 엎드립니다
♧ 해창 바다에서 광화문까지
-삼보일배
나 아주 어려 벌거숭이의 몸을 내맡겼었네
뻘밭 가득 뛰어놀던 짱뚱어 같은 아이들과
게걸음치며 달려가던 농게 같은 아이들과
온몸에 갯벌을 바르며 뻘 싸움을 하고
미끄럼틀을 만들어 놀이터가 되어주었던
푸른 것들이 찬란한 것들이 치솟고 일렁이던
뻘밭의 바다
백합들이 바지락들이 갯지렁이들이
꿈틀거리며 뛰어놀던 갯벌의 바다
내게 만약 끔찍한 저주가 있다면
뻘밭을 막아 없애려는 무리에게 쏟아내야겠네
내게 만약 죽음보다 더 지독한 증오가 있다면
뻘밭을 팔아 배 부르려는 무리에게 퍼부어야겠네
싱싱한 것들로 온통 번쩍이는 생명으로 꿈틀거리는
소중한 선물의 뻘밭
살아서 아름답게 흘러온 것들 흐르는 대로 두어야 하듯
밀물과 썰물로 들고나는 뻘밭의 바닷길 막아서는 아니 되네
이 땅에 내린 축복의 뻘밭 우리 아이들에게 돌려주어야 하네
그 뻘밭의 바다에 순결한 입맞추며
엎어지고 자빠지며 내달리게 해야 하네
이제 우리 해창 바다에서 광화문까지 삼보일배로 나아가네
사랑으로 나아가네, 뉘우침으로 참회로 나아가네
그 길 한걸음 한걸음에 전쟁 반대와 통일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그 길 무릎 꿇고 엎드린 자리 자리마다에
새만금의 갯벌에 생명과 평화를 소원하는 마음으로
해창 바다에서 광화문까지 삼보일배로 나아가네
♧ 의귀리 속냉이골 작은 푯말을 세우다
도둑처럼 숨어들어 옆드리며 피눈물을 뿌리고 가던
아들딸이 있었으리라
먼발치로 고개 숙이며 여린 어깨 들먹였겠지
숨죽여 울었으리
아내와 형제들과 그 어머니와 할머니가
아버지와 그 할아버지들 기가 막혔으리라
엎어지고 자빠진 주검들이 여기 있네
손가락질당하며 핏발을 곤두세워
삿대질당하던 주검들이 여기 묻혀 있네
강대국들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등 떠밀려
서로의 가슴에 총칼을 들이밀던 눈먼 날이었네
우리들 모두 지울 수 없는 큰 상처를 주고 또 받았네
어제오늘이 아니네
십 년 아니 이십 년 반세기가 넘도록 아직껏 풀리지 않고
나와 내 이웃을 단죄하며 옥죄는 이념의 사슬에 묶인 채
낙인찍힌 영혼들이 여기 누워 있네
찔레 덩굴 잡목 숲 무성히 우거져 있었네
찔레꽃 무더기, 바람을 부르는 상여 꽃 같은 흰 꽃무더기
두런두런거리며 피어나던 곳
4.3의 제주여, 돌이켜보면 여기 이 주검의 자리
내 부모 내 형제의 죽음을 보며 산으로 올라간 이였네
내 이웃과 친구의 죽음을 막으려 총을 잡은 이였네
누가 누구의 얼굴에 침 뱉을 수 있겠는가
누가 누구의 등에 돌을 던지며 적개심을 불러일으키겠는가
용서하고 용서하지 않는다면
화해하고 화해하지 않는다면
거기 어찌 평화가 깃들 수 있겠는가
여기 어찌 생명의 씨앗 하나 자랄 수 있겠는가
평화의 섬 제주여
오늘 우리 속냉이골 쓸쓸한 무덤가
반목의 풀을 베고 적대의 덩굴 걷어내며
손에 손에 돌 하나 모아 방사탑을 쌓았네
작은 푯발 하나 세웠네
다시금 고개 숙이네 엎드려 절을 하네
여기 엎드려 머리 조아리는 것
해묵은 상처를 씻겨주고 닦아주며
서로의 등 다독여주자는 것이네
일으켜주자는 것이네 일으켜 함께 가자는 것이네
속냉이골 맴돌며 떠도는 넋들이여
모두 여기에 오시라 어서 이 자리에 오시어
차림 음식들 나누시라 어서어서 오시라
넋들이여 그 모든 속냉이골 혼백들이여
생명과 평화의 손길로 우리들 위로 드리오니
부디 편히 잠드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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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냉이골 : 제주도 남제주군 남원읍 의귀리, 속칭 산꾼이라고 부르던 유격대원들의 무덤이 방치되어 있던 곳.
* 박남준 시집 『그 아저씨네 간이 휴게실 아래』(실천문학사, 2010)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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