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별 2
불현듯 부르는 소리에
얼른 대답하고 뜰에 나서니
초저녁 일찍 나온 별 하나
객쩍게 웃으며 있네.
어느 낯선 거리를 기웃거리다가
이제야 겨우 당도한
먼 옛날의 답장 없는 편지인지
해묵은 그리움이 깜빡거리네.
어느 하늘가에서
너와 나는
바라만 보는 눈빛이었을까.
세월을 문닫고
시름없이 여위다가
네게 닿을 때쯤
스러지려니, 가끔씩
네 생각에 지치지 않으리.
♧ 죽어서 사는 영혼의 몸짓
한때 나를 태우던
지금은 휴지를 태우는 시간
껴안고 뒹굴던 몸짓들이
까맣게 몸을 뒤틀다가 허공으로
실낱같이 스러지는 고통의 시어들
그 하얀 고뇌를 조상하는 것이다
혀를 날름거리는 불꽃의 영혼 속으로
불타는 열대의 새소리가 무성하다
우두두두두- 열대 스콜이 내리고
온몸의 세포가 몸을 떨던 환희와
잉잉- 밑동을 지나가는 기계톱의 우는 소리
빛을 연모하여 오로지 하늘로 짙푸르던 의지는
몇 백 년이어도 순간에 허망한 것인가
내 가난한 앉은뱅이책상 A4 용지에
올챙이처럼 꼬물거리던 까만 문자들이
감동을 잃고 하얀 배를 드러낼 때
좌악- 가슴 복판을 예리하게 찢고 가는
고통에 뒤틀리는 영혼의 몸짓
모든 존재 위로
햇살은 한결같이 내리고
죽어야 한다, 부활의 꿈을 위하여
피를 철철 흘리는 길에
사랑은 죽어서 사는 영혼의 몸짓
불도 안 켠 창으로 드는 파란 달빛
재가 된 시어들이 가슴에 환하다]
♧ 새소리 5
그 숲에
햇살에 내다 건 나뭇잎처럼
그 왁자하던 새소리는
한 번도 내게로 온 적이 없네
바람의 들판에 한 그루
느릅나무에 외로운 새
믈 내게 들어와서 울더니
느릅나무는 베어지고
새는 어디로 날아갔을까
사랑할 때
사랑으로 꽉 찼을 때
모두 이디로 떠났을까
도무지 보이지 않더니
비 오는 날
유리창에 줄줄 흘러내리네
바람이 부는 거리에
낙엽은 갈 곳을 모르고, 그 새소리
옛 느릅나무 그루터기에서
저만 울고 있었네.
♧ 수평선 3
가도
가도
그 자리
닿을 수 없는
그리움
가다가
가다가
죽어서 건너갈
나의 수평선
♧ 그림자 3
가다가 문득 서면
멈칫 멈추는 소리
어이-,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면 무한 허공
가만히 흔들리는 풀잎인 듯
고요히 일렁이는 물결인 듯
천 길 물속에서 부르시나
하늘 끝에서 손짓하시나
바람으로 오시는 이여,
모르게 눈여기시는 이여
♧ 사막의 방랑자
붉은 사막의 방랑자
해를 뜯어먹으며
바람에 굴러다니는 텀블링플랜트*
언제였나, 꽃을 피웠던 기억으로
마른 수세미같이
하염없이 우기를 기다린다.
어릴 적 병명도 없이 실실 마를 때
나를 들쳐 업고 한의원을 오갈 때
어머니의 등이 지금도 따뜻하다
바람 부는 날은 아버지의 공일
포구의 주막으로 뗀마*처럼 따라갈 때
어부의 억센 손이 지금도 넉넉하다.
생명을 빚진 자
사랑에 눈먼 자
날마다 산을 오르면서
새벽이슬에 젖으면서
풀잎처럼 기도하면서
어느 날엔가
가슴에 철철 넘치기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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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텀블링플랜트 : 사막에서 굴러다니다가 비가 오면 그 자리에 뿌리를 내려 번식하는 식물.
* 뗀마 : 전마선의 일본어.
* 김종호 시집 『날개』 (푸른사상, 2017)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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