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김종호 시집 '날개'의 시(1)

김창집 2022. 5. 18. 02:16

 

2

 

불현듯 부르는 소리에

얼른 대답하고 뜰에 나서니

초저녁 일찍 나온 별 하나

객쩍게 웃으며 있네.

 

어느 낯선 거리를 기웃거리다가

이제야 겨우 당도한

먼 옛날의 답장 없는 편지인지

해묵은 그리움이 깜빡거리네.

 

어느 하늘가에서

너와 나는

바라만 보는 눈빛이었을까.

 

세월을 문닫고

시름없이 여위다가

네게 닿을 때쯤

스러지려니, 가끔씩

네 생각에 지치지 않으리.

 

 

 

죽어서 사는 영혼의 몸짓

 

한때 나를 태우던

지금은 휴지를 태우는 시간

껴안고 뒹굴던 몸짓들이

까맣게 몸을 뒤틀다가 허공으로

실낱같이 스러지는 고통의 시어들

그 하얀 고뇌를 조상하는 것이다

 

혀를 날름거리는 불꽃의 영혼 속으로

불타는 열대의 새소리가 무성하다

우두두두두- 열대 스콜이 내리고

온몸의 세포가 몸을 떨던 환희와

잉잉- 밑동을 지나가는 기계톱의 우는 소리

빛을 연모하여 오로지 하늘로 짙푸르던 의지는

몇 백 년이어도 순간에 허망한 것인가

 

내 가난한 앉은뱅이책상 A4 용지에

올챙이처럼 꼬물거리던 까만 문자들이

감동을 잃고 하얀 배를 드러낼 때

좌악- 가슴 복판을 예리하게 찢고 가는

고통에 뒤틀리는 영혼의 몸짓

 

모든 존재 위로

햇살은 한결같이 내리고

죽어야 한다, 부활의 꿈을 위하여

피를 철철 흘리는 길에

사랑은 죽어서 사는 영혼의 몸짓

불도 안 켠 창으로 드는 파란 달빛

재가 된 시어들이 가슴에 환하다]

    

 

새소리 5

 

그 숲에

햇살에 내다 건 나뭇잎처럼

그 왁자하던 새소리는

한 번도 내게로 온 적이 없네

 

바람의 들판에 한 그루

느릅나무에 외로운 새

믈 내게 들어와서 울더니

느릅나무는 베어지고

새는 어디로 날아갔을까

 

사랑할 때

사랑으로 꽉 찼을 때

모두 이디로 떠났을까

도무지 보이지 않더니

비 오는 날

유리창에 줄줄 흘러내리네

 

바람이 부는 거리에

낙엽은 갈 곳을 모르고, 그 새소리

옛 느릅나무 그루터기에서

저만 울고 있었네.

 

 

 

 

수평선 3

 

가도

가도

그 자리

 

닿을 수 없는

그리움

 

가다가

가다가

 

죽어서 건너갈

나의 수평선

 

 

 

 

그림자 3

 

가다가 문득 서면

멈칫 멈추는 소리

 

어이-,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면 무한 허공

 

가만히 흔들리는 풀잎인 듯

고요히 일렁이는 물결인 듯

 

천 길 물속에서 부르시나

하늘 끝에서 손짓하시나

 

바람으로 오시는 이여,

모르게 눈여기시는 이여

 

 

 

 사막의 방랑자

 

붉은 사막의 방랑자

해를 뜯어먹으며

바람에 굴러다니는 텀블링플랜트*

언제였나, 꽃을 피웠던 기억으로

마른 수세미같이

하염없이 우기를 기다린다.

 

어릴 적 병명도 없이 실실 마를 때

나를 들쳐 업고 한의원을 오갈 때

어머니의 등이 지금도 따뜻하다

바람 부는 날은 아버지의 공일

포구의 주막으로 뗀마*처럼 따라갈 때

어부의 억센 손이 지금도 넉넉하다.

 

생명을 빚진 자

사랑에 눈먼 자

 

날마다 산을 오르면서

새벽이슬에 젖으면서

풀잎처럼 기도하면서

어느 날엔가

가슴에 철철 넘치기를 기다린다

 

---

* 텀블링플랜트 : 사막에서 굴러다니다가 비가 오면 그 자리에 뿌리를 내려 번식하는 식물.

* 뗀마 : 전마선의 일본어.

 

 

                                             * 김종호 시집 날개(푸른사상, 2017)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