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월간 '우리詩' 2022년 5월호의 시(4)

김창집 2022. 5. 20. 00:02

 

산수유 그 여자 - 홍해리

 

눈부신 금빛으로 피어나는

누이야

네가 그리워 봄이 왔다

 

저 하늘로부터

이 땅에까지

푸르름이 짙어 어질머리 나고

 

대지가 시들시들 시들마를 때

너의 사랑은 빨갛게 익어

조롱조롱 매달렸나니

 

흰 눈이 온통 여백을 빛나는

한겨울, 너는

늙으신 어머니의 마른 젖꼭지

 

아 아,

머지않아 봄은 또 오고 있것다.

 

 

 

물고기 화석 - 방순미

 

어머니는 생선 장사꾼이었다

생선에서 나는 비린내보다

그분의 일생이 더 지독했으리라

 

밥상머리에 발라주던

생선뼈처럼 야위어진 어머니

 

돌돌 말린 가슴으로

가느다란 숨길 고요히

따라가다 돌아서길 몇 밤

 

말문도 막힌 고통을 견디며

해결되지 않는 병마에 맞서

점점 물고기 화석이 되어 간다

 

 

 

푸른 잠 정재원

 

목 길어지는 모퉁이 길

푸른 옷 짓던 한 계절 끝나갑니다

닫힌 달개비 창문은 반투명으로 어둡습니다

 

그늘 깊어지면 그때 저쪽 빛깔 입고 오세요

우리는 천천히 아침을 기록해 둔 경전입니다

 

8월을 견디어

반쪽 꽃잎 완성되면

당신의 순간을 펼치겠습니다

 

쓸쓸함이 바닥에 닿을 때까지

꽃이 지키는 집

 

몰입과 포기해야 하는 다른 몰입

 

청보라 입술 닫은 어머니는

눈 감고 귀 막고 매일매일

다른다른 똑같은 잠을 자고

 

수백 장의 안개 속에 달개비꽃

얇은 얼굴을 지워 갑니다

 

 

 

참깨꽃 - 배세복

 

농번기는 앞마당이 그중 붐볐다

아버지의 깻단이 두어 번 치솟았다

순식간에 내 등짝은 탈곡마당 되어

참깨알이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학교 파하면 놀지 말고 빨리 오랬냐 안 했냐

여봐! 이눔의 새끼 밥도 멕이지마

 

깻단을 묶던 동생이,

꼬리 치며 반기던 강아지가,

깻대에 붙어있던 깨꽃잎 몇이,

나를 비웃는 것 같았다

세상에서 내가 예뻐라 하던 것들은 더욱

나를 비웃는 것만 같았다

 

 

 

들판을 흐르는 냇물을 따라 걷다 보면 백수인

 

들판을 흐르는 냇물을 따라 걷다 보면

어떨 때 도란도란 흐르고

어떨 때 쩌렁쩌렁 소리를 지르는지

알 것도 같다

 

어떨 때 졸졸졸 흐르다가

어떨 때 울음 섞인 목소리로

휘돌아가는지 알 것도 같다

 

다정하게 조용히 흐르다가

어떨 때 입에 거품을 물고 흐느끼며 자지러지는지

알 것도 같다

 

잔잔한 수면

흰 구름 군데군데 떠 있는

파아란 하늘을 가슴으로 품고 살다가

어떨 때 그 하늘을 종잇장처럼 꼬깃꼬깃 구겨버리는지

알 것도 같다

 

냇물 따라 인생을 걷다 보면

 

 

 

목련여관 - 조미희

 

목련꽃 진 자리 전쟁터 같아서

얼굴을 돌렸네

 

그해 남자는 목련에 세 들었지

꽤 우울했지만,

목련은 남자의 심정과는 다르게 활짝 웃었어

찌그러진 남자의 자존심으로 목련은 폈네

아이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 때 남자의 얼굴은 창백해졌지

지킬 게 많아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거지

가난은 목련꽃 흰빛처럼 맑아서 쉽게 깨졌네

 

저 흰 빛이 다 타들어 가기 전까지만 버터 보자고

주먹을 꼭 쥐었지

만발한 목련들이 뚝뚝 지면

수치로 얼룩진 길들이 따라붙어 뒤돌아보지 않았네

 

손가락이 커지고

목련 이파리 속에 모여 앉은 아이들

비좁은 방을 밝히는데

남자는 문밖 손잡이를 쥐고 생각에 잠기네

여관 너머 전셋집 잔금은 언제 구하나

 

꿈이 커서 가난한 남자는 시들어가네

목련 안에 갇힌 남자 목련 너머를 꿈꾸지만

목련은 남자의 온 생을 덮치고

시간은 목련을 지나 목련여관을 허물고

남자는 목련 속으로 사라졌네

 

가장들의 넥타이가 목련나무에 매달린 봄이 또 찾아오고

아이들은 목련 안에 가득 차고

손가락 길이가 나뭇가지처럼 커지면

그 남자처럼 사라지는 시간

 

목련이 필 때마다 목련 속 아이들이 우네

그리움은 환상통처럼 자꾸 더듬어지는 것

목련 나무 꽃들이 인화된 사진처럼 선명하네

 

 

                                   * 월간 우리20225월호(통권 407)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