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황길엽 시집 '비문을 읽다'의 시(1)

김창집 2022. 5. 17. 00:01

*모래지치

 

풀꽃 닮은 여자

 

그녀는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

쪼그리고 앉아 헤죽거리고 웃는

꽃잎 같은 천진한 눈망울

딸아이 손에 쥐어진 바나나에

투정부리는 그녀

아이는 바나나 한 개 뚝 떼어 잡힌다

깔깔 웃는 눈 속으로

아이의 슬픈 얼굴이 앉아 있다

 

그녀는 햇살 좋은 마당에 귀를 옮겨놓고

삼십칠 년 세월

고장 난 벽시계에 갇힌 줄도 모르고

제 자리로 돌아가는 길은 어디쯤에서 길을 잃었는지

눈꽃처럼 휘날리는 꽃잎처럼

그녀의 생각들은 허공으로 떠돌기만 한다

 

그녀는 풀꽃처럼 앉아

후두둑 떨어지는 바람처럼

잠시 왔다가는 아이 얼굴

슬픈 눈의 초점만 머물다

바나나 껍질처럼 축 늘어진 사월의 햇살이

차갑기만 한 고독한 그녀

 

그녀는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

 

 

 

사는 법

 

1

수평으로 누워있는 바다를

한순간으로 건너간

붉은 액정처럼 번지는 햇살

초록의 바다를 껴안고 쾌락에 빠져있는 동안

구름도 산언저리만 서성거린다

짓궂게 바람은 툭툭 쳐보지만

요염하게 흔들리는 바다의 몸부림은

발가벗은 햇살 강하게 끌어당긴다

운명적인 만남에 대하여

허공으로 분산되었던 힘까지

 

2

물비늘처럼 뭍으로 기어오르는

바다신음소리

헛구역질이 심한 입덧

바다의 몸에서 조산은 시작되었다

다산이었던 몸이 심한 진통으로

입가에 허옇게 물거품을 토하고

어미는 시퍼렇게 죽어가고

둥둥 뱃머리에 온갖 깃발들

만선의 징소리 요란하다

 

3

쉽게 저울질하지 말아야지

눈금 하나 지나치고 나면

다시 되돌아 그 자리인

내 가난한 눈으로 보는 저울 눈금은

날마다 흔들리는 이유인 것을

반쯤은 버리고 서서 눈금을 봐야 정확하다고

쓸쓸히 웃음을 보이신 어머니

반을 훨씬 넘게 버렸는데

자꾸만 추락하는 시간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다

저울추의 무게는 희미해져

삶의 무게만 아득하게 눈금을 넘어가

질펀하게 거리를 메운다

 

4

하루도 쉬지 않고

삶의 좌판 위에 진열된 그 쓸쓸함에

오늘은 그대에게 보낼 그리움을 채워

우표 없는 미납소인만 쿡 쿡 찍어 보낸다

무심하게

수취인 주소불명만 수갑처럼 채워져

나를 끌고 간다

 

 

 

비문을 읽다

 

연어만 강으로 거슬러 오르는 것이 아니다

 

바람이 가득 담긴 얕은 솔숲 아래

 

긴 세월 떠나 있다 돌아온

 

아직도 마르지 않은 세월을

 

낡은 도포자락에 싸안고

 

하얗게 닳은 고무신 두 짝으로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목청 높게 부르는 수십 수백 세월들이

 

북으로 오르는 철로 위에

 

일렬종대 줄을 섰다

 

 

 

소리, 경이로운 것에 대하여

 

빗방울이 은행잎에 콕콕 구멍을 뚫는 소리

 

창문 열어젖히고 허공으로 내달리는 바람소리

 

아침을 깨우는 어둠이 쫓겨 가는 소리

 

아가의 초롱한 눈으로 세상 보는 소리

 

빨간 장미꽃잎 마지막 인사로 낙하하는 소리

 

가을비는 그렇게 모두를 흔들고

 

바닥에서 그리움이 튀어오르는 소릴 듣게 한다

 

 

 

창가에 앉아

 

기억도 반쯤 풀어져 밤사이 넘나들던

꿈속보다 더 몽롱한 거리로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시간

어둠이 허물처럼 벗겨진다

거리에 자동차 소음들이

질펀하게 번질 때마다

죽음을 기다리는 시한부의 슬픔으로

냉기에 떨고 있는 아스팔트

자동차들이 흘린 온기 따라 돌아 눕는다

아직 어둠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가로등

부동자세로 서서

풍경 속으로 들어간 사이

따뜻한 커피 한잔을 주문해본다 나에게

 

 

 

죽순

 

달빛 조용히 대나무 숲에 앉으면

댓잎 수런거림에

어머니는 밤잠을 설친다

사랑하는 이유가 아니어도

흙의 몸을 뚫고

한낮의 뜨거움으로

등을 곧추는 세월

불끈 동여맨 마디마다

어미의 그리움은 자라고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아침햇살에

대나무 숲은 흥건하다

만삭의 몸을 뒤척일 때마다

대궁 아래 수액을 뚫고

어미의 몸에는 가시 꽃들이 핀다

 

   

                  *황길엽 시집 비문을 읽다(도서출판 전망, 2007)에서

                                      *사진 : 모래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