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품꽃
오수에 섞여 나오는 거품
돌아갈 집도 없이 떠돌던 안식의 방황이다
은폐된 시간의 물증이다
통증을 견뎌낸 방언이다
견디기 힘든 꿈들이 역류한다
기억은 소화불량이라 했나
망각은 새로운 가치라 했나
브레이크 고장 난 자전거는 순간의 일
스트레스는 달리는 비탈길
푸른 물 챙겨들고 떠나는 여행
여행은 두려움의 극복과정이라 한 카뮈를 믿기로 한다
삶의 의미보다 삶을 더 사랑하기로 한다
자주 혼자가 되기로 한다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나 있는
고요로 벽지를 바른 너와집
그곳에선 거품도 꽃이 되리라
♧ 해조음
짠물을 만나는 지점에서
잠시 몸을 뒤척이는 갯물
안도와 원초적 갈망이 뒤섞이는 곳
몸을 버리지 않고는 닿을 수 없는 그곳
수없이 각을 허물며 해변에 닿을 때까지
부딪히고 무너지던 그곳이 길이었다
더 큰 격정 속으로 뛰어들 용기를 준 바다
호구를 위해 타던 바이킹처럼 흔들리는 배
살아남기 위해 지르던 외마디
스스로 선택한 유배지 그 바닷가는
천만의 눈으로 너머를 보게 한 혼돈의 세계
총량의 법칙을 뛰어넘는 보상이었다
바다가 강물을 받아 안을 때
멀리서 이명처럼 들리는 해조음
관음이 아득한 소리로 그물코를 뜨신다
♧ 바닥론
살만한 내일이 펼쳐지리라는 믿음은
잠시 일었다 스러지는 포말
추락의 덧없음이 예고도 없이 찾아와
날개 접힌 채 서서 우는 짐승
늪에 빠져 허우적대 본 사람은 안다
바닥이 얼마나 오르고픈 꿈인지
몸부림쳐 바닥에 올라서 본 사람은 안다
수없이 짓밟힌 바닥은 견고하다는 걸
다음 층계로 오르는 디딤돌이라는 걸
딛고 솟구쳐 넘을 수 있는 허들이라는 걸
바닥에 바닥바닥 체화된 사람의 몸은 가볍다
다 잃고 깡통이 된 그 때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최적의 상태다
그러므로 바닥은
끝이 아니라
스스로 이룩한 단단한 배경이다
♧ 푼크툼푼크툼
빛의 보폭을 조절한다
색조를 맞추는 조리개가 어지럽다
동공에 포착된 먹잇감이
125분의 1초로 네모 안에 갇힌다
누가 나를 정보에 틀 안에 가두었는가
내 안에 창은 언제나 열려 있다
먼지를 일으키며 달리는 마라토너의 발놀림
흩어졌다 모아졌다 하는 구름
비를 몰고 다니는 바람소리
찰나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우연
하찮게 버려지는 것들의 아우성
빛 뒤에 숨어 있는 섬광 그리고 촉수
수없이 망설이는 손가락 끝에 떨림
창 안에서 꿈틀거리는
빛의 속도로
깊숙한 곳을 찌르는 상처들
♧ 허공 경작지
땅 한 뙈기 없다 하소연하였더니
경작지를 내어 주셨다
풀 한 포기 돋지 않는
건조한 황무지 돌밭이었으나
쓰나미도 덮쳤다 스러지고
토네이도도 일었다 잠드는 명당 터
물의 시원
바람의 진원지
한 알의 물방울에 허공을 담고
한 줄기 바람으로 우주를 해체한다
충돌할수록 뻗어가는 뿌리줄기
끝없이 확장되는 새로운 지평
이곳의 농경수는
혜천慧泉에 고이는 일급수
여름 들판 수직으로 내리는 푸른 비
구름이 모였다 흩어졌다 꽃을 피우고
수 억 만의 별들이 언어의 집을 짓는 천혜의 영토
무한 광대한 이곳에 거주 이전하는데
반세기가 걸렸다
♧ 걸어가는 사람
더러는 휘어지고
더러는 꺾인 겨울 연밭
얼키설키 몸을 포갠 적요를 바라본다
뼈대만 남은 앙상한 몸
비정상적인 커다란 발
성난 듯 허망한 듯 어딘가를 바라보는 강렬한 시선
쓰러질 듯 위태롭게 걸어가는 자코메티
빈한한 실존 앞에 명치끝이 아프다
살아간다는 것은 직립을 포기하지 않는 힘
걸어간다는 것은 세상을 다르게 보는 일
바라본다는 것은 미지를 향한 모험
존재는 이 모든 것을 버렸을 때
다다를 수 있는 정수精髓 아닌가
새봄 연이 물 위로 손을 내밀듯
영혼의 창은 다시 열려야 한다
소멸 이후 어둠은 알 수 없지만
그래서 두렵지만
군더더기 없는 깡마른 몸으로
너머를 응시하면서 성큼성큼 걸어간다
생은 직진이니까
* 김혜천 시집 『첫 문장을 비문으로 적는다』 (시산맥, 2022)에서
* 사진 : 병꽃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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