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김혜천 시집 '첫 문장을 비문으로 적는다'의 시(7)

김창집 2022. 5. 19. 01:10

* 병꽃나무

 

거품꽃

 

 

오수에 섞여 나오는 거품

 

돌아갈 집도 없이 떠돌던 안식의 방황이다

 

은폐된 시간의 물증이다

 

통증을 견뎌낸 방언이다

 

견디기 힘든 꿈들이 역류한다

 

기억은 소화불량이라 했나

 

망각은 새로운 가치라 했나

 

브레이크 고장 난 자전거는 순간의 일

 

스트레스는 달리는 비탈길

 

푸른 물 챙겨들고 떠나는 여행

 

여행은 두려움의 극복과정이라 한 카뮈를 믿기로 한다

 

삶의 의미보다 삶을 더 사랑하기로 한다

 

자주 혼자가 되기로 한다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나 있는

 

고요로 벽지를 바른 너와집

 

그곳에선 거품도 꽃이 되리라

 

 

 

해조음

 

 

짠물을 만나는 지점에서

 

잠시 몸을 뒤척이는 갯물

 

안도와 원초적 갈망이 뒤섞이는 곳

 

몸을 버리지 않고는 닿을 수 없는 그곳

 

수없이 각을 허물며 해변에 닿을 때까지

 

부딪히고 무너지던 그곳이 길이었다

 

더 큰 격정 속으로 뛰어들 용기를 준 바다

 

호구를 위해 타던 바이킹처럼 흔들리는 배

 

살아남기 위해 지르던 외마디

 

스스로 선택한 유배지 그 바닷가는

 

천만의 눈으로 너머를 보게 한 혼돈의 세계

 

총량의 법칙을 뛰어넘는 보상이었다

 

바다가 강물을 받아 안을 때

 

멀리서 이명처럼 들리는 해조음

 

관음이 아득한 소리로 그물코를 뜨신다

 

 

 

바닥론

 

 

살만한 내일이 펼쳐지리라는 믿음은

 

잠시 일었다 스러지는 포말

 

추락의 덧없음이 예고도 없이 찾아와

 

날개 접힌 채 서서 우는 짐승

 

늪에 빠져 허우적대 본 사람은 안다

 

바닥이 얼마나 오르고픈 꿈인지

 

몸부림쳐 바닥에 올라서 본 사람은 안다

 

수없이 짓밟힌 바닥은 견고하다는 걸

 

다음 층계로 오르는 디딤돌이라는 걸

 

딛고 솟구쳐 넘을 수 있는 허들이라는 걸

 

바닥에 바닥바닥 체화된 사람의 몸은 가볍다

 

다 잃고 깡통이 된 그 때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최적의 상태다

 

그러므로 바닥은

 

끝이 아니라

 

스스로 이룩한 단단한 배경이다

 

 

 

푼크툼푼크툼

 

 

빛의 보폭을 조절한다

 

색조를 맞추는 조리개가 어지럽다

 

동공에 포착된 먹잇감이

 

125분의 1초로 네모 안에 갇힌다

 

누가 나를 정보에 틀 안에 가두었는가

 

내 안에 창은 언제나 열려 있다

 

먼지를 일으키며 달리는 마라토너의 발놀림

흩어졌다 모아졌다 하는 구름

비를 몰고 다니는 바람소리

찰나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우연

하찮게 버려지는 것들의 아우성

빛 뒤에 숨어 있는 섬광 그리고 촉수

 

수없이 망설이는 손가락 끝에 떨림

 

창 안에서 꿈틀거리는

 

빛의 속도로

 

깊숙한 곳을 찌르는 상처들

 

 

 

허공 경작지

 

 

땅 한 뙈기 없다 하소연하였더니

경작지를 내어 주셨다

 

풀 한 포기 돋지 않는

건조한 황무지 돌밭이었으나

 

쓰나미도 덮쳤다 스러지고

토네이도도 일었다 잠드는 명당 터

 

물의 시원

바람의 진원지

 

한 알의 물방울에 허공을 담고

한 줄기 바람으로 우주를 해체한다

 

충돌할수록 뻗어가는 뿌리줄기

끝없이 확장되는 새로운 지평

 

이곳의 농경수는

혜천慧泉에 고이는 일급수

여름 들판 수직으로 내리는 푸른 비

 

구름이 모였다 흩어졌다 꽃을 피우고

수 억 만의 별들이 언어의 집을 짓는 천혜의 영토

 

무한 광대한 이곳에 거주 이전하는데

반세기가 걸렸다

 

 

 

걸어가는 사람

 

 

더러는 휘어지고

더러는 꺾인 겨울 연밭

얼키설키 몸을 포갠 적요를 바라본다

 

뼈대만 남은 앙상한 몸

비정상적인 커다란 발

성난 듯 허망한 듯 어딘가를 바라보는 강렬한 시선

쓰러질 듯 위태롭게 걸어가는 자코메티

 

빈한한 실존 앞에 명치끝이 아프다

 

살아간다는 것은 직립을 포기하지 않는 힘

걸어간다는 것은 세상을 다르게 보는 일

바라본다는 것은 미지를 향한 모험

 

존재는 이 모든 것을 버렸을 때

다다를 수 있는 정수精髓 아닌가

 

새봄 연이 물 위로 손을 내밀듯

영혼의 창은 다시 열려야 한다

 

소멸 이후 어둠은 알 수 없지만

그래서 두렵지만

 

군더더기 없는 깡마른 몸으로

너머를 응시하면서 성큼성큼 걸어간다

 

생은 직진이니까

 

 

 

            * 김혜천 시집 첫 문장을 비문으로 적는다(시산맥, 2022)에서

                                      * 사진 : 병꽃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