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귀포 인연(因緣)
인연 깊은 땅
서귀포로 오라
해조(海潮)처럼 흘러와서는
머리 풀고 누워라
베갯머리 저고리 안섶까지
밀려오는 물결소리 들어보아라
밤새 설레이는 물소리
뒤척이는 잠 속을
가슴앓이 섬 하나
품에 안은들
저 바다가 어쩌겠느냐
여명(黎明)처럼 새가 운다
인연의 푸른 친구여
삶이란 게 홰홰 도는 물살처럼
가고 오는 생애의 한 구석
얽어지는 정(情)
풀어내며 살 일이다.
♧ 서귀포의 봄
서귀포 순정(純情)은
바다 속 드는
비바리 가슴이다
부끄러운 속살
언 듯 내비치는
서귀포의 봄은
바람의 길에서 일어나는
빛들의 반란
잠 깨어 우는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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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리 : 제주어로 나이 어린 처녀(해녀).
♧ 서귀포의 봄은 허공에 떠서
남녘 하늘 끝 햇발 서더니
활궁처럼 팽팽히
휘어지는 수평선
무수히 날아와 꽂히는 빛살
온 몸에 맞고도 꿈쩍 않더니
섬그늘 처녀 아이들
젖꼭지만한 수선꽃 봉오리 벌릴 즈음
청정의 서귀포 바다
찰방찰방 물갈퀴 걷어차며
건너 오더라
서으로 흐르는 물같이
칠십 리 포구 거슬러 올라
꽃샘바람 슬슬 일으키더니
부끄러워라, 물빛 젖은 가슴살
언 듯 언 듯 보이더라
얼굴 돌리며 붉히며
두 눈 슬며시 감다말고
그렇지,
서귀포의 봄은 허공에 떠서
먼 산 한 번 바라보고
먼 바다 한 번 굽어보고
♧ 포구(浦口)의 마을(1)
어둠의 이불을 덮고
포구(浦口)는 잠이 들었다
뒤척이는 막내 섬
이불 밖으로 삐쳐나온 발가락
아흐레 반쪽 달이
물 먹은 가슴을 내밀고 있었다
썰물이 빠져나간 해변
섬을 지키는
등대불이 외홀로 졸고
포구의 작은 마을 안길
낡은 괘종소리 같은 닭 울음소리
여명이 날리는 시각
누가 걸어오고 있다.
♧ 포구의 마을(2)
마을 안에 오늘은
누구 집 제삿날인가 보다
무덤 같은 초가집
지붕 위로
반쪽 달빛이 내려앉아 있다
향가지 타는 냄새가 나고
마당 안
불빛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누가 올레 밖을 나오고 있다
담벽에 기대어 누구를 기다리는지
댓잎 바람
담구멍 사이로 달아난다
올 사람 아직도
오지 않나 보다
멀리 밤바다 물결소리
골목 안을 맴돌고 있다.
♧ 수평선에 떠 있는 섬
눈썹 같은 섬 하나
수평선에 떠서 흔들리고 있다
아득한 그리움의 눈물
유년 날에 날려 보낸 꿈의 연줄
허공에 매달려 팔랑거리고 있다
이제 어른이 되어도
점(點) 같이 섬 하나
가슴에 박혀 산다
언제나 멀리 바라보는
마음 안의 수평선
연줄 타고 날아가는 꿈
어른이 되어도
꾸고 있다.
*김용길 시집 『빛과 바람의 올레』(서울문화사, 2010)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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