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김용길 시집 '빛과 바람의 올레'의 시(4)

김창집 2022. 5. 21. 00:32

 

서귀포 인연(因緣)

 

인연 깊은 땅

서귀포로 오라

 

해조(海潮)처럼 흘러와서는

머리 풀고 누워라

베갯머리 저고리 안섶까지

밀려오는 물결소리 들어보아라

 

밤새 설레이는 물소리

뒤척이는 잠 속을

가슴앓이 섬 하나

품에 안은들

저 바다가 어쩌겠느냐

 

여명(黎明)처럼 새가 운다

인연의 푸른 친구여

삶이란 게 홰홰 도는 물살처럼

가고 오는 생애의 한 구석

얽어지는 정()

풀어내며 살 일이다.

 

 

 

서귀포의 봄

 

서귀포 순정(純情)

바다 속 드는

비바리 가슴이다

부끄러운 속살

언 듯 내비치는

 

서귀포의 봄은

바람의 길에서 일어나는

빛들의 반란

잠 깨어 우는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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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리 : 제주어로 나이 어린 처녀(해녀).

 

 

 

서귀포의 봄은 허공에 떠서

 

남녘 하늘 끝 햇발 서더니

활궁처럼 팽팽히

휘어지는 수평선

 

무수히 날아와 꽂히는 빛살

온 몸에 맞고도 꿈쩍 않더니

섬그늘 처녀 아이들

젖꼭지만한 수선꽃 봉오리 벌릴 즈음

청정의 서귀포 바다

찰방찰방 물갈퀴 걷어차며

건너 오더라

 

서으로 흐르는 물같이

칠십 리 포구 거슬러 올라

꽃샘바람 슬슬 일으키더니

부끄러워라, 물빛 젖은 가슴살

언 듯 언 듯 보이더라

얼굴 돌리며 붉히며

두 눈 슬며시 감다말고

 

그렇지,

서귀포의 봄은 허공에 떠서

먼 산 한 번 바라보고

먼 바다 한 번 굽어보고

 

 

 

포구(浦口)의 마을(1)

 

어둠의 이불을 덮고

포구(浦口)는 잠이 들었다

뒤척이는 막내 섬

이불 밖으로 삐쳐나온 발가락

아흐레 반쪽 달이

물 먹은 가슴을 내밀고 있었다

 

썰물이 빠져나간 해변

섬을 지키는

등대불이 외홀로 졸고

포구의 작은 마을 안길

낡은 괘종소리 같은 닭 울음소리

여명이 날리는 시각

누가 걸어오고 있다.

 

 

 

포구의 마을(2)

 

마을 안에 오늘은

누구 집 제삿날인가 보다

 

무덤 같은 초가집

지붕 위로

반쪽 달빛이 내려앉아 있다

향가지 타는 냄새가 나고

마당 안

불빛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누가 올레 밖을 나오고 있다

담벽에 기대어 누구를 기다리는지

댓잎 바람

담구멍 사이로 달아난다

 

올 사람 아직도

오지 않나 보다

멀리 밤바다 물결소리

골목 안을 맴돌고 있다.

 

 

 

수평선에 떠 있는 섬

 

눈썹 같은 섬 하나

수평선에 떠서 흔들리고 있다

아득한 그리움의 눈물

유년 날에 날려 보낸 꿈의 연줄

허공에 매달려 팔랑거리고 있다

 

이제 어른이 되어도

() 같이 섬 하나

가슴에 박혀 산다

언제나 멀리 바라보는

마음 안의 수평선

연줄 타고 날아가는 꿈

어른이 되어도

꾸고 있다.

 

 

                               *김용길 시집 빛과 바람의 올레(서울문화사, 2010)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