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물의 노래
처음엔
빗방울이었습니다.
어느 깊은 산곡에 내려
다만 막막함이었지만
오, 그것은 오케스트라의 첫 음절
음악은 비로소 시작되었습니다.
쫄쫄 흐르다가 강물이 넘쳐흐를 때에
사막에서도 툰드라에서도
생명의 노래는 모든 경계선을 지웠습니다.
처음엔 한 방울
눈물이었습니다.
메마른 가슴으로 내려
오, 그것은 거대한 용광로에 첫 화입
너와 내가 녹아서 우리의 노래가 되었습니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에서 시작된
흑인영가는 미시시피 큰 강이 범람하였지요.
러시아의 눈물, 카튜사 마슬로바는
잔혹한 땅, 시베리아의 얼음을 녹이고
‘부활’*의 노래가 되었습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한강은 두물머리의 연가를 부르며
햇살 푸른 아침 바다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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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엇 비처 스토의 소설.
*톨스토이의 소설.
♧ 그림자 7
-영혼
때로는
호젓한 숲길에서
건듯 불어오는 바람이거니
때로는
바다가 너무 넓어서
슬픈 해조음이거니
낮달처럼 외로운 날
어이-, 어이-
누구라도 부르고 싶을 때
문득 혼자가 아니었네
추적이는 비
모르게 흐느끼다가
해 쨍쨍한 날
어디로 스며버리는
나보다 더 슬픈 이 있네
♧ 그림자 2
풀잎 새에 하늘거리며
짐짓 먼 산에 눈을 두어보지만
아무 때 어디서나
햇살처럼 일일이 내게로 꽂히는
투명한 시선이 허공으로 있네
채워도 채워도 배는 고프고
안아도 안아도 허전한 가슴
실험실 유리 상자 안의 흰쥐
어디에도 네 숨을 곳은 없어
끝없이 사하라 사막을 끌고 간다
눈 내리는 들판에서
드디어 너는 보았지
또박또박 발자국을 찍으며
아직도 걸어온 그 길에
돌아갈 수도 지울 수도 없는 네 기록을
누구신가
안개처럼 허공을 가리고
내 안에서 나를 기록하는 이여,
그대는 어느 별에서 밀파된
전능자의 눈동자인가
♧ 이 겨울에
이 겨울
땅에 엎드린 인고 위로
눈이 내린다
고귀한 삶을 위하여
한 번은 죽어야 한다
죽지 않는 삶은 신이 없는 세상
원색의 본능으로 죽어야 한다
사랑을 번제를 드린 후
맑은 햇살 눈부시게
눈이 내린다
누구라 차마 범하랴
저 깊은 무채색의 콘트라스트
원색의 본능으로 한 번은 죽어야 한다
♧ 나무 2
흙의 가슴으로
하늘을 세우려는
적막한 의지
바람에 흔들리며
눈비에 질척거리는 저만치
휘돌아 보이지 않는 길에
삶은 몰래 피었다 지는 꽃
해가 뜨고 해가 지고
숨이 차서 달리는 계절에
산 하나 지고 가는
누구나
저 숲에 외로운 나무
푸름을 가꾸며
가을 속을 걸어가는 고요
나무는 아름답다.
♧ 책장
숲으로 가리라, 그 세월
나무처럼 꼬장꼬장하게 서서
숲의 이야기를 꿈꾸고 있다
황무한 가슴에
나무를 심어
꽃이 피고 새가 날아들기를
실로 오래 기다려온 도열
길 잃은 시간에
허탄한 열정은 탕진하고
잠 못 드는 긴 밤
네 유폐된 열망을 듣는다
그대 사랑 진실하기에
탕자의 깨달음으로
그대를 부르노라
남은 날을 다하여 부르리라
*김종호 시집 『날개』 (푸른사상, 2017)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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