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면증
상처의 깊이만큼 티눈으로 박힌 기억들
떼어낸 자리마다 더 크게 자리한다
째깍거리는 시계 분침 소리
나는 그곳으로 이미 끌려가고 있다
창밖으로 언제 와 앉았는지 하얗게 내린 달빛
졸린 눈으로 새벽을 맞이하고 있다
♧ 아이는
젖니 하나 뽑아 옥상으로 올라간 아이 지붕에다 던져야 새 이를 준다는데 까치발 세워 하늘 향해 던지고 또 던진다 아이와 떨어지기 싫어 자꾸만 옷섶으로 되돌아와 별처럼 붙어 하얗게 웃는다 하늘보다 더 파랗게 질린 아이는 가슴에 붙은 별을 따 고운 나뭇잎에 싸서 담벼락을 사이에 두고 돌무덤을 만들고 쪼그려 앉아 주문을 외운다 따개비 같은 두 발로 콩콩 굴러도 대답 없는 것에 무심히 하늘만 본다 심술이라도 부리는 양 바람이 출렁일 때마다 하얗게 내려오는 햇살에 초롱초롱 빛나던 아이의 눈은 사르르 풀어진다 입속에서 떨어져 나간 공허함을 까치가 채워줄 꿈속으로
♧ 자갈치 사람들
새벽부터 뜨겁게 달구어지는 자갈치
돌아가는 풍차처럼 거리가 출렁일 때마다
아낙들의 앞치마는 흥건하게 젖어간다
한낮의 뜨거움은 조금씩 잘려나가고
어깨를 삐걱거리며 하루를 챙기는 손끝에는
무겁게 피로가 매달려
언제 왔는지 어둠이 옷섶에 쌓인 채
주름진 노동의 손등에서
번들거리는 생선 비린 냄새 핥고 있다
빌딩 곳곳 어둠을 묶어놓은
화려한 불빛도 말을 아끼고
가끔씩 뱀처럼 검은 혀를 휘둘리며
조명탄을 터트리는 자동차 불빛만
아스팔트를 점령해 버리는 시간
철판 위에 생선처럼 달구어져
얼큰하게 취기가 돈 목소리에
하루는 또 그렇게 소주잔으로 비워진다
♧ 천상초
꽃잎마다 눈물 담은 꽃
천상으로 향한 그리움만
활짝 피우고
바람, 그 작은 스침에도
꿀꺽 마른침 삼킨
화사한 웃음 보내는 너는
그리움
♧ 천성산 계곡
솔 숲 사이로 비집고 들어선 햇살
산길따라 나보다 먼저 아작 아작 걷는다
붉게 물든 천성산
산나리 꽃잎 눈부시어 그녀는 한참을 서성이다
칡넝쿨 사이 머리박고
쏟아져 내리는 바람에 화끈거리는 가슴 식히는데
산뽕나무 갈증 난 목소리가 돌돌
계곡 아래 흐르는 물소리 되어 흐른다
긴 그림자 만들어가는 오후햇살
하늘은 자꾸만 깊어지고 어느새 구름으로 풀어지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
배낭 속에는 꼼지락꼼지락
상쾌한 풍경들이 들어와 지금 부산하다
♧ 바닥은 절망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닿지 않는
잡히지 않는
비어 있는
그건 절망이 아니다
그 깊이에는 언제나 바닥이 있다
텅 비어 있던 마음 안에
꼼지락거리는 붉은 햇살
따뜻해
온몸에서 장미 꽃송이 피우고
심장에 깊이 박힌 뿌리
잔가지를 올릴 때마다
혓바닥에 수없이 돋아나는 가시
찔린 자국이 깊어갈수록
장미향 짙은 날개를 펄럭인다
*황길엽 시집 『비문을 읽다』(도서출판 전망, 2007)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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