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한 놈 - 김영서
산삼을 캤는데 임자가 없다
혹시나 하여 술에 담가 놓았는데
해가 바뀌어도 술과 삼이 섞이질 않는다
하기야 산 속에서 몇 십 년 도 닦은 몸 아닌가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사십도 소주를 부었더니
달 포 만에
잎이 하얗게 꽃처럼 피고
술이 누르스름하게 익어버렸다
한 잔 머금으니 이런 이런
독한 것들 끼리 엉키는 맛이라니
인생이 향기롭지 못한 것이
독하지 못한 탓이었다면
우리 집에 마실 오시게
산삼주 한 잔 어떤가
♧ 가을 대화 - 류지남
한창 봄인 고등학교 2학년 아들과
함께 가는 가을 아침 출근길,
얇은 속치마 같이 살랑거리는 안개 사이로
알록달록 첫사랑 같이 아슴한 풍경들이
가슴에 닿을 듯 닿을 듯 부딪히고 스러진다
불끈, 아들 녀석과 맞닿고 싶은 맘에
얘, 창밖 풍경 참 멋있지 하고 묻는데,
그 녀석 눈길은 핸드폰에만 꽂혀있다
콧노래라도 부르고 싶던 마음이 그만
된서리 맞은 호박잎처럼 시무룩해져
먹먹하게 그저 앞이나 보고 달리는데
고갯길 마악 내려가려 하는 참이었나
아들 녀석 하는 말, 예-
가을 풍경 참 섹시하네요, 아버지
허- , 그 말 한 마디에 그만 뒤집혀
가을 풍경 속으로 풍덩 빠지고 말았다
♧ 겨울 저수지 – 박순호
깃발도 없이 중심을 향해 돌진하는 맹렬한 기세
열정은 저런 게 아닌가
앞뒤를 재지 않고 온몸으로 밀어 올리는 것
한 사람의 운명을 자신의 기류로 옮겨 오는 것
곧나한 업을 수행하는 물의 행렬
남아 있는 파문 하나까지도
무릎 아래로 깊숙이 끌어당긴다
물의 느린 손길이 얼음 벽돌을 찍어내는 족족
바람이 지어 날라 다리를 넓혀간다
몸으로 터득한 다리 축소술
때가 되면 감각과 숨을 내려놓을 줄 아는 저수지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고요한 다리 하나 놓여진다
♧ 단비 – 신경섭
솔잎 끝 물방울
삭정이 무나르는 까치
산마루 넘는 안개
하얀 노란 푸른 보라
저마다 안간힘 쏟아
단내 나는 봄
♧ 서산마애삼존불 - 이경호
쓸데없는 말이 튀어나오려는 날이면
골짜기 하나 먹고 싶어진다
알면서도 모든 사연 폭포에 묻고
모르는 척 하늘을 여백으로 둘 줄 아는
풍경 하나 먹고 싶어진다
느티와 붉나무가 언제 눈이 맞았는지
그 후손이 누구인지
무지개 피라미가 누구네 돌담으로 들어갔는지
서론이 긴 사람이 어떻게 본론으로 걸어갔는지
태양의 말씀을 누가 차근히 받아 적었는지
다 알고 있지만 침묵하는 여기에서
바지도 젖고 가슴이 젖는, 그렇게
옛 스님들도 젖다 갔을 여기에서
아침을 알리던
닭 모가지 자른 중생이 누군지 알면서도
탓하지 않는 여기에서
아침이 그렇게 사라져도
냉수 한 사발 찾지 않고 그저 웃기만 하는 여기에서
내가 무슨 말을 참고 있는지
다 알고 있는 여기에서
다 알고 있어서 붉어지는 초록에게 눈짓하면서
미소 한 덩이가 먹고 싶어진다
*충남작가시선 제7집 『미소 한 덩이』(도서출판 심지, 2012)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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