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 한 잔의 사색
말 많아 거칠어진 입안도 행궈내고
우쭐대던 키도 낮춰 귀까지 씻었더니
다기에 어리는 얼굴 한 눈에 쏙 들더라
누구나 그리움을 품고 살아가는 거
그 자리 이슬 받아 찻물을 얹었더니
다향을 먼저 맡고서 백목련이 벙글더라.
♧ 사랑의 불씨
-‘사랑이란 이세상의 모든 것’*이며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이라지만
그 사랑, 제 그릇만큼 밖에는 담지 못하리
가슴속에 숨은 불씨 ‘사랑’을 퍼 올리면
다문화집 작은 불씨 꼬다케 피어나고
삼동의 칼바람조차 달동네 비켜간다
인력시장 모닥불 간힘 쓰며 타는 새벽
벌거숭이 나무의 다 내준 빈 가지에
뉘 생각 골몰히 젖은 반쪽 달이 걸려 있다
실체 없는 사랑에 안타까운 목마름
손난로 몰래 받아 해동을 꿈꾸는 밤
새터민, 빈 그릇 가득 고봉 눈이 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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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 에밀리 디킨슨의 ‘사랑이란 이 세상의 모든 것’에서 차용.
♧ 경칩 무렵
아침 가치 날아와서
님 오신다 기별할 때
길 떠난 그리움이
찻잎을 틔우는가
우전차
끓기도 전에
초인종 기척 소리.
♧ 기다림
찻물을 달일 때면
그리움도 끓습니다
기다림은 다향처럼
우러나며 새로워져
부딪는
다기소리에도
축복이 내립니다.
♧ 꽃비 속의 소야곡
어스름 벚꽃 길을
숨어보는 상현달
내 마음 언저리
손수건 흔들어서
스미며 되살아나는 분홍 꽃비 맞는다
노란 리본 맺어준
순애보 이야기도
하늘의 달 그리듯
아득해 보일세라
목 메인 소야곡으로 되살아나는 저녁
몇 번인지 알 수 없는
늘 새로운 올 사월에
묵혀서 숨겨뒀던
벚꽃의 서정들이
마른 밭 금간 자리를 짜깁기하고 있다.
♧ 도채비 꽃*
사랑하면
담도 커져
밀애하던
곳집 곁에
저건 필시
도채비가
달아놓은 지전일시
꽃상여
요령 대신에
고고지성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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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채비꽃 : 도채비는 도깨비. 산수국의 제주어.
*김영기 시조집 『갈무리하는 하루』(나우, 2010)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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