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의 말
또 한 권의 시집에다 길을 묻습니다
지나온 행간마다 근심만 쌓입니다
얼마나 닦고 닦아야
흐르는 물이 될까요
내 앞에 오는 모든 것, 작은 인연 아니지요
그 안에 살아야 하는 건 운명이라 하겠지요
시인이 뭐냐 물으면
도로 입을 닫습니다
부고도 없이 죽어간 어휘들을 찾습니다
욕심을 내려놓아 아픈 곳을 꿰맵니다
드러내
채찍을 맞더라도
기쁘게 내밉니다
2022년 오월에 한희정
♧ 목련꽃 편지
인편도 우편도 아닌, 홀연히 온 봄소식
늦잠결 초인종 소리, 눈 비비며 찾아온
앞마당
목련나무가
편지 한 장 들고서
바람결 사십 년 전 편지 한 통 따라 왔네
무심코 연 팔레트에 열두 색깔 꽃이 피듯
아버지
한 글자 한 글자
몽글몽글 꽃이었지
외로움이 깊을수록 꽃은 더욱 환했네
자취방 창호 문에 우련 비친 섬 하나
초승달
꽃 이파리에다
안부 묻던 그 봄밤
♧ 낮달맞이꽃
어쩌다가 백주대낮에 달맞이꽃 폈는가
적시를 못 찾아서 쪼그려 앉았는가
겸연쩍,
눈웃음치는 게
별 의미 없다는 듯
중심이 아니어도 힘이 되는 길은 있어
진심이면 통한다는 저 분홍 아웃사이더
늘 긍정,
스크럼 짜나 봐
한 마디씩 신났어
♧ 마늘밭 뻐꾹 소리
해풍에 젖고 마르는
알뜨르 마늘밭에
싹둑 잘라 마늘 대궁
햇볕 아래 누워 있네
줄줄이 사월의 현장,
뻐꾸기 울음 우네
견실했던 생애만큼 말수 없던 할머니,
뒷마당 조부님 묘 이장하던 그날처럼
목이 쉰 호곡소리가 환청인 듯 다가와
♧ 서운암 꽃 도반
1
내 눈 속 까만 눈부처 세고 또 셉니다
다시 또 세다가 그 장독서 놓쳤어요
놓아라,
부질없다는 듯
능소화 꽃 집니다
2
손가락 셈법으로 더하는 법만 배우다가
하나씩 아기범부채 빼는 법을 배우네요
비우면
통할까 몰라
들숨 먼저 마십니다
3
연못법당 초록방석 내려올 때 보입니다
가부좌 튼 어리연꽃 사미니 닮았네요
눈물 톡,
흩어진 구슬로
염주알을 뀁니다
*한희정 시집 『목련꽃 편지』 (한그루, 2022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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