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래 – 허유미
이것은 새와 나 사이의 거리
노트 속에서 새들이 날아오른다
둥글다는
다가오는 말일까
멀어지는 말일까
접시 위에 노른자 무리들이
군무를 펼치고 있다
식탁 위 양념통과 그릇 말라 가는 과일이 숲을 이루고
난반사되는 지저귐 아래서
포크로 노른자를 찌르면
새는 깨진다
은유가 끝가지 다정했던 적이 있었는가
잠시 망설이면 타인이 된다
부리처럼 식은 밥을 쪼아 먹다
고독과 무리 사이
불안한 거리에서
은유는 시작된 건 아닌지 골몰한다
노트 속에 남은 새들의 발자국
무리는 세상에서 가장 큰 고독
♧ 흙의 날 – 고주희
유감스러운 일인지 다행스러운 일인지
내가 태어난 이른 봄날의 달력
흙의 날이라는 이름표를 줍는다
누군가 곱게 빗다 반을 꺾은 머리빗처럼 발아래 자꾸만
간질대는 것
어제는 그이와 한 몸이 되는 꿈을 꾸다 꿈에서도
꿈인 것을 알아채고 울지 않았다
잊을 만하면 비릿하게 올라오는 물비린내처럼
울타리 밖은 어느새 목련, 미래의 얼굴은 너무도 태연하게 나타나
내 손을 낚아채곤 사라졌다
외로움이 가득한 사주라서 어디든 흘러들어야만
완성이 되는 물의 사주
봄이면서 봄 아닌 이별의 부장품으로 흙의 날
삽 한 자루 받아 쥐고 벌벌 떨었다
큰일을 치르느라 정작 울지도 못한
청객이 바로 당신인 것처럼
이 망할 꿈에서 깨어나라고 어깨를 흔들면
발아래 흥건한 목련들
곧잘 사람의 체취를 풍기며 나타나는 것들이
문상 가듯 한꺼번에 몰려온다
너무 애달파하면 살煞을 맞는다는 말
구제되지 않는 망가짐의 말
몰래 시드는 검은 밤의 달력으로
한때는 전력을 다한 당신을 옮겨 심었다
♧ 반성문 – 김애리샤
난 무얼 잘하고 무얼 잘못했나요
울창한 나무일수록 헛헛해 보여요
잎마다 초롱초롱한 눈알들을 달고 있어도
쉽게 허전해져요 금방 들통나죠
수작부리지 말고 이대로만 살게 해 달라고
뚝뚝 자살하는 가지들이 보여요
오장육부를 다 토해내고도
한 발자국도 걷지 못하는 불우한 농담들
누군가는 취해 가고 누군가는 실종되어 가는
농담들, 그 속에 채널을 맞추고
스위치를 숨기는 나는 누구일까요
쓸모없는 농담들이 위로가 될 때가 있잖아요
아무리 꺾어 버려도 계속 자라나는 가지들처럼
어리석은 통증만 남발하는 공허한 시간들처럼
바로 거기예요 삭정이가 녹아내릴 만한 곳
거기에 나를 연결해요
직방입니다 그러면
작은 새처럼 팔랑팔랑 굽이쳐 밀려드는 기억들이
잔뿌리를 토닥여 줄지도 몰라요
나무들은 최선을 다해 시들어 갑니다
나는 최악을 다하겠습니다
♧ 은행나무 도마 – 김효선
나무의 결을 쓰다듬으면
무덤은 희미하게 맥박이 뛸 것 같아
내 귀에 속삭이는 목소리를 주워
천 년 동안 나무로 살았다는 시를 쓰고 싶어
노란빛으로 스며드는 오래된 섬광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야
낡은 송전탑 부근에서 들려오는 을씨년스런 주파수
시작은 이렇게 간절하지만 돌아올 땐 늘 피 묻는 종아리인 걸 여기서 나는
버려진 장작에 모닥불을 붙이곤 하지
알코올을 달콤하게 빨아들인 뱅쇼는
주어 없이는 돌아갈 수 없는 목적어처럼
깊어질수록 건너온 뒤를 잊어버려
돌아서 나갈 수 없는 전생처럼
사랑하면
불안은 어느 쪽으로 가든 만나는 나이테 같아
이윽고 도착한 은행나무 아래의 고백
어둠은 몰래 온 자객을 업고
가장 오래된 유적 앞에서 참회의 무릎을 꿇지만
목소리를 잃어버린 입은 몹시 단순해서
제 얼굴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용서를 쑥 뽑아 들지
지독한 냄새가 주렁주렁 매달릴 때까지
자신의 체취를 잊으려고 내려치는 심장
무덤을 쓰다듬듯 결을 쓰다듬는 조용한
어떤 손들은
* 허유미 고주희 김에리샤 김효선 시집 『시골시인 – J』 (걷는사람, 2022)에서
* 사진 : 탐라국 해저
'문학의 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희정, 시집 '목련꽃 편지' 발간 (0) | 2022.06.15 |
---|---|
제주4․3 74주년 추념시집 '서로의 이름을 부르다 보면'(2) (0) | 2022.06.14 |
권경업 시집 '하늘로 흐르는 강'의 동시(2) (0) | 2022.06.12 |
월간 '우리詩' 6월호의 시(2) (0) | 2022.06.11 |
2022 상반기 '혜향문학'의 시와 시조(1) (0) | 2022.06.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