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지랑대 – 전선용
네가 무너질까
중심 잡는 일이다
펄럭이는 네 꿈 추락할까
힘써 지탱하는 일이다
돌아와 어깨 기대면
등까지 내미는 아량
별이 모유 같아서 모세 지팡이에 싹이 돋는다
절개된 밤에 흰머리 같은 달빛
그리움은 선인장이라서
이 자리
대못 투성이다
♧ 중독 – 나영애
반평생 넘게 마셨다
아침이면 급하게
혼자 쓸쓸할 때
식후에
친구하고 마실 때는
마음 문 열려
활자들이 깔깔깔 쏟아졌다
지금은
흩어진 시어 불러 모을 준비로
또 커피 앞에 앉았다
♧ 윤회의 책갈피 – 정봉기
사월의 숲
오고 감이 그렇듯,
느린 분주함이 돋아나고 스러지는 때,
잡히지 않는 존재가
물소리를 흘러내려 고임을 풀어내고
빛의 산란을 꿴 새잎들은
푸른 코러스로 멋진 공연을 한다
책장과 책장 사이
깃털보다 가벼운 집착들이
스스로 무거워져 낙엽으로 묻히던 날,
솜털보다 가벼워진 민들레 씨는
파란 하늘을 날아
산 안에 산사에 머문다.
♧ 물밑 사진사의 사계四季 - 홍순화
그 연못에는
풍경을 찍다가 늙어버린 사진사가 사진관을 지키고 있다
연못 크기의 어안렌즈로 풍경을 복사하지만
수면이 고르지 못한 날은 해상도가 낮아
렌즈를 닦고 바람이 잠들기를 기다린다
카메라는 처음부터 A모드로 고정되고
우울한 가을은 조리개 F5.6 봄은 F8이다
봄이 해체되면 떠다니는 벚꽃잎으로 사진관이 분주해진다
연꽃의 배경은 청개구리, 연잎에 앉아 포즈를 잡는 날이면
걸작이 기대되는 여름이다
연속으로 플래시가 터지는 소리에
빗방울이 또르르 구른다
실물과 똑같은 풍경이 전시되는 사진관의 내부는
저 물밑
그는 스물네 시간 꼬박 작업을 한다
같은 풍경에도 사계가 있어 색의 농도를 맞추고
줌으로 경치를 끌어당겨 계절의 체온을 감지한다
잉어 가물치 소금쟁이 고아가 된 쌀붕어가 동그란 필체로
안부를 수면에 적어두고 가지만
미처 읽지 못하고 바람에 지워질 때도 있다
안개가 끼는 날
한나절의 휴식이 주어졌지만 뜨거운 햇살에 난반사되는 빛을 잡기위해
서둘러 어안렌즈에 필터를 장착하고
그동안 익힌 하늘을 암기한다
부지런한 그도 겨울엔 어쩔 수 없이 임시휴업을 해야한다
그럴 땐 따뜻한 물밑에서 손가락으로
낚싯줄에 걸린 봄을 조심스럽게 끌어당겼다
♧ 자연처럼 - 이영광
매일 하는 코로나19브리핑 뉴스에서, 정은경 청장이나 무슨 본부장 어느 반장이 아픈 사람들처럼 현황, 주의, 당부 말씀 전할 때 옆에서,
노란 점퍼도 안 입고 마스크도 없이 수어사가, 위험천만의 표상처럼 아픈 자연처럼, 표정과 손짓과 몸짓으로, 그러니까 온몸으로 연기가 날 듯 온몸을
전달한다 그 침묵에 아- 하고 탄식, 탄식하지 못할 때가 많아요 말문이 콱 막히면 몸이 비상이 나서 통째로 출동하는구나 싶다가도 자꾸,
놓쳐요 그이는 눈앞에서 연기처럼 사라진다 못 들어요 정 청장은 방역 교과서고 수어사는 불타는 방역교과서인데도, 불이 눈앞에서
픽, 픽, 꺼지는 거, 이게 내 상태다 너무 급한 건 더뎌 나는 본래 귀머거리, 나는 드디어 눈 뜬 장님, 청장 브리핑 마치고 내려올 때 수어사들도,
교대합니다 교대하는 그 모습 힐끗, 안 보고선 채널 돌리는 내 눈곱 낀 눈에 딴 노란 점펴 등장하고, 수어사 조용하고 폭발적인 몸부림 준비하느라 잔뜩
긴장한 얼굴, 그이는 말을 알아요 그러나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처럼 말 모르러, 진저리치며 떠나간다 온통 출동합니다, 신음 한 점 없는 자연처럼
* 월간 『우리詩』 2022년 6월호(통권 408호)에서
* 사진 : 능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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