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이윤승, 시집 '사랑이거나 다른 종이거나' 발간

김창집 2022. 7. 2. 00:14

 

시인의 말

 

나도 모르는 곳에 나를 놓아두고

지구를 몇 바퀴이나 돌았다.

 

서면 보이지 않고

앉으면 비로소 보이던

 

젖은 풀잎의 행간을 지나온 바람, 다시 돌아보니

다 길이었다.

 

20225

이윤승

 

 

 

마르코폴로 산양

 

  티베트 고산지대를 오르내리던 마르코폴로 산양 새끼가 무리에서 이탈을 했다. 고원을 혼자서 터벅터벅 걷다가 털썩 주저앉는다. 다시 일어서지 못한다. 무리에서 이탈은 죽음을 예감하기 때문이라는데, 엷은 갈색의 몸, 목을 꼿꼿이 세우고 눈을 둥그렇게 뜬 채 하늘만 바라보고 있다.

 

  어느 마지막 날이 그러하듯 하늘을 바라보는 일이란,

  어미 없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일이란,

 

 

 

벽도 창공이 될 수 있다고 못은 생각했다

 

머리통이 견고한 못은

노래가 되지 못한 노래를 부르며 단련되었다

 

꽉 조이며 맞물리던 시간에서

못은 얼마나 단련되며 길들여졌나

 

흰 벽을 우듬지라 믿으며

걸어놓은 빨간 모자가 열매인 줄 알고 쪼아 먹으며

후렴구가 모두 같은 노래를 부르며

웅덩이 빗물처럼 벽 안에 고여 있었다

 

고여 있는 물이라는 생각을 잊고

흐르는 물처럼 때로는 경전처럼

명상의 자세로 앉아 있으면 벽이 창공이 될 수 있을까

 

자목련 서 있는 꽃밭으로 눈길이 간다

나무 어깨에 이마에 박힌 자줏빛 꽃송이들

바람이 망치질을 할 때마다

나무를 빠져나온 꽃잎들

날개를 파닥이며 새처럼 창공으로 날아간다

 

먼 눈빛으로 사람들이 벽이라 느낄 때

못은 꽃잎처럼 날개를 펴고 창공으로 그 너머로

마음껏 날아가고 있는 것이다

 

 

 

백 년 후

 

벽 안에 갇힌 채

어둠을 단물처럼 음미하면서 단련되었다

단련된다는 것은 콘크리트의 이빨이 다 빠지도록

살아내는 것이다

 

비명을 끌어안은 나뭇등걸처럼

그는 전생의 어느 망치로 살았길래

지금은 되돌려져 못이 되었나

 

녹슨 시간들이 벽 안에 실핏줄처럼 번져 있다

오도 가도 못했다는

그림자 같은 말만 하고 있다

벽 안의 소심한 주관자임을 자백하고 있다

저 벽을 들어 올릴 수는 없을까

 

백 년 후쯤

벽이 바스러져 조금씩 가루로 흩날릴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콘크리트 같은 단단한 벽을 돌다리처럼

딛고 건너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오지 않을 시간일지라도

허방이라 해도 기다릴 것이다

확률은 낮겠지만

이미 너무 늦었지만

 

 

 

사랑이거나 다른 종()이거나

 

곤히 잠든 밤마다

돌아오지 않을 사랑에 대해 생각했다

 

이미 도착한 별빛을 찾아 떠났다

서로 다른 식물의 종이 따라왔다

 

고인 물처럼 정박당한 시간, 뒤척거리는 새

마네킹처럼 심장을 응시하며 자지도 않고 길바닥으로

소리를 흘려보낸다

 

아침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은

주소를 잊어먹은 아비를 기다리는 것일까

입 안에 이팝나무 꽃 한 줌을 넣어주던 어미도

이미 돌아오는 길을 잊어먹은 모양이다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죽은 적 없는 것처럼 떠 있는

아비 구름 어미 구름을 볼 때마다

먼 행성의 불빛들이 밤마다 찾아왔다

희미해진 옛집을 생각했다

 

적요한 흰 초승 낮달

바깥이 어두운 내면들

주파수가 다른 소리의 파장을 들으며

이틀째 같은 속도로 비가 내린다

뒤꿈치를 보니 어제 죽은 햇살의 다른 종이다

공중에서 길을 잃은 비문 같은 떠돌이 구름 몇 장 초대장에 새겼다

 

나는 늘 알 수 없는 존재를 사랑하곤 했다

문장이 완성되지 않았다

 

 

                   * 이윤승 시집 사랑이거나 다른 종이거나(문학의전당 시인선 350, 2022)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