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김정순 시집 '늦은 저녁이면 어때'의 시(3)

김창집 2022. 11. 1. 09:11

 

고마로1

 

 

눈 감아 걷는 이 길은 우리 마을

눈 돌리면 담장 낮은 마당에 봉선화가 공기 틈을

엿보며 피었다 지지요

 

동네 삼촌이 울담 아래서 날이 무딘 낫을

쓱쓱 갈아요

마당 귀퉁이 텃밭에 마름 옥수숫대 베려고

하나 와요

 

로고가 보이도록 종이컵을 들고 다니는

휴식공간은 없어도 마을 잔등에서

해가 떠오르면 한라산이 마당에서 놀다 가지요

 

옥상에는 유연제로 몸 씻고 나온 보라색 꽃 이불

햇볕과 바람을 만나 촉촉한 이야기로 담 넘어가는

해를 붙잡지 않아요

 

주차장 없는 골목길 목소리 큰 편의점 여자

가게 앞에 주차한 흰색 쏘나타 운전자와

악을 쓰며 싸워요

 

시끄러운 거리는 정화사 세탁소 아저씨가

맑은 물로 말끔히 빨아주지요

 

대문마다 명찰 달고 따뜻한 안부 묻는 골목 고마로1

우리 마을입니다

 

 

 

어떤 기억

 

 

마른 땅속 비 스며들어 방지턱을 걸어 나온

태양의 선물이 돋아난다

자리돔이 사는 마을

해무는 수평선을 곤죽처럼 뭉개고

무심한 듯 불어오는 바람에 호박은

노랗게 꽃 핀다

 

빈 하늘 잿빛으로 섧게 울던 날

발바닥 페로몬 향을 따라가면

호박꽃 어깨 위에 꿀은 무리 없이

먹을 수 있다고 믿었다

 

손톱 아래 끼어 있는 어떤 기억

어쩌면 닿을 수 있을 것 같은 사영처럼

떠다니는 것들

눈길보다 더 높이 쌓은, 그러나

더욱 높이 뛰는 파도를 감당하지 못했다

 

마른 낙엽 밟으면 단풍시절 그리운 시간

불을 켜듯 노랗게 꽃물 드는 이유는

나 모르고 싶다

 

 

 

 

공중을 나는 양파

 

 

무수히도 떠돌았다

뿌리를 내리려 애쓰지만 온기 없는 가슴들

냉혹 속에 겉도는 발부리

 

가물가물 떠오르는 기억 하나

섶다리 건너 소로길, 소로길 위에

넓은 들판이 어렴풋이 보이고

바람 막는 접담 아래

우렁우렁 양파 움씨 틔우는 곳

한껏 발돋음하니 소실점에서

떠오르는 동박새 울음

 

가늘게 떠도는 흙냄새 감아 옹벽 같은

망을 뚫었다

시간마다 맞불로 옮겨가는 저 가늘고

어린 흰 발들

솟구치는 초록 눈빛 허공을 휘어잡을 듯

그 먼 땅을 찾아 발을 내민다

 

 

 

형제섬*

 

 

대답 대신 바다를 걸었다

형제섬 아래는 어떤 마을이 있을까

멸치가 형에게 대들고 돌돔이 장을 보는

그러면서 해를 먹고 그렇게 아마,

 

형제섬 이마에 나무는 온종일 수평선 흔들다

흰 파도와 잠을 자고

 

나그네 떠도는 바닷길에서

나는 통풍으로 발을 안고 주저앉았다

물 언저리 겹겹이 쌓여가는 섬 아래서

파도 모아 집을 짓고

물길에게 울타리 부탁하였다

 

천둥 칠 때마다 이 여 저 여

푸른 청각이 자라는 바위 그늘에

머물고 싶어 젖은 손 털며

한사코 달아나는 바람의 옷깃을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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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섬 : 제주도 서남쪽 모슬포 근해 작은 섬.

 

 

 

늦은 저녁이면 어때

 

 

희자야

트로트를 노래하는 동안 우린 충분히

변하고 말았구나

새 한 마리 나뭇가지에서 다른 가지로

날아가는 시간이었어

 

끝 모르는 이야기 감고 덧감아

손 편지 눈이 부시던 우리

 

다리가 길어 바지 핏이 잘 어울리던 너

다리가 짧아 볼품없던 나

줄기 끝에 흰콩제비꽃 마음마저

읽어주던 너

 

지금 너 가슴이 뛰기는 하는 거니?

뛰면 뛰게 내버리자

 

늦은 저녁이면 어때

 

 

 

                    *김정순 시집 늦은 저녁이면 어때(메이킹북스, 2022)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