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섬을 떠난 사람들은
섬을 떠난 사람들은
파도 소리에도
옷이 젖는다
일상의 먼지를 털고
저물어가는 창을 열면
집어등集魚燈
타는 불빛을
쫓아가는 멸치떼
♧ 섬에 있어도 섬이 보입니다
섬에 있어도
눈 감으면
이리 환히 보이는 걸
내 젊은 날 왜 그렇게
떠나야만 보였을까
이맘쯤
사려니숲엔
복수초 노랗겠다
눈 밝혀 보려하니
섬은 떠나야 보이는가
푸른 파도 앞에서도
이게 섬인 걸 몰랐었다
이맘쯤
한림 앞 바다
자리 팔짝 뛰겠구나
교래 숲 가운데 서도
숲과 나무 다 보이는 걸
나무만 보고 있다고
어리석다 하잖아요
눈 감고
새 소리 들으면
영실 단풍이 활활 타네요
정류헌에 노루 왔으니
산록도로 눈 쌓였겠다
새 소리 외로우면
그토록 혼자 울면
와락 와
안기는 섬들
우린 모두 섬이었구나
♧ 파도
부서질 줄 아는 사람
외로운 섬
파도 됩니다
바다, 그 아무리 넓어도
발끝까지 어루만져
그리움
보석처럼 빛나
별로 뜨는
섬 하나
섬 둘
♧ 포구浦口
1
빈 배 머문 포구에는
노을 베고 누운 하루
사공이 남긴 외길
밀물이 먹어들면
개펄에
닻 부려놓고
섬을 향해 눈 감는 배
2
비바리 갈옷 적삼
뉘 볼라 설익은 속살
등에 밴 소금길랑
그냥 지고 가더라도
남겨둔
유자 꽃망울
밤새 살몃 피었다
3
배 떠난 삶의 둘레
마파람만 서성이고
솔잎에 찔린 낮달
시름시름 앓던 그날도
섬 기슭
어욱밭에는
들꿩 알을 품는다
♧ 성산 일출봉
섬에서 태어나서
섬이어야 하는 운명의 고리
이제는 끊어야지
돌아보지도 말아야지
박차고 하늘로 솟는
발부리를 잡았다
그래, 섬이 아니다
웅장한 바위산이다
붙잡은 가녀린 손
차마 떨치지 못해
쌓이고 맺힌 응어리
토해내는 붉은 해
파도에 씻겨가는
전설이 차라리 곱다
참아서 패인 가슴
베풀어 다 채우고
한 가닥 미련까지 버려
절로 높은 일출봉
성산포 솟는 해는
누가 보아도 하나인데
버거운 삶 지고 오른
간절한 소망들이
하나씩 나누어 갖고
덩그라니 남은 하나
*고성기 시집 『이제 다리를 놓을 시간』(한 그루, 2022)에서
'문학의 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권경업 시집 '별들이 쪽잠을 자고 간'의 시(3) (0) | 2022.11.09 |
---|---|
월간 '우리詩' 11월호의 시(1) (0) | 2022.11.08 |
김정순 시집 '늦은 저녁이면 어때'의 시(4) (0) | 2022.11.06 |
계간 '제주작가' 가을호의 시(2) (6) | 2022.11.05 |
권경업 시집 '별들이 쪽잠을 자고 간'의 시(2) (1) | 2022.11.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