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권경업 시집 '별들이 쪽잠을 자고 간'의 시(3)

김창집 2022. 11. 9. 02:08

 

위안리의 겨울밤

 

 

눈 덮인, 구례군 산동면

위로 받고 싶은 위안리의 하얀 밤은

지난해, 이르게 피어

이르게 져버린 산수유꽃이

만복대 위에서 반짝입니다

 

압니다, 바라보면 눈 시린

지리산 언저리 저 잔별들은

그 이름 아직 부르기라도 하면, 아직도

뜨겁게 가슴 벅차오를 내 아버지 형제들의

애처롭게 스러져 간 눈망울이란 것을

 

 

 

잠자리

 

 

바람 속의 삶에서

잠자리를 찾고 있는 너는

, 푸른 상소를 꿈꾸는

청빈하여 자유롭던 조선 선비의 화신

 

온 세상이 한 점 벼랑 끝인

잠자리의 잠자리

 

 

 

고물시계

 

 

내 딛음, 어린놈의 한 걸음을 위해

황량한 사냥터를 휘돌아오지만

, 빈손이나 다름없는 지친 하루

 

수렵시대에도 그랬을, 째깍째깍

쫓듯 쫓기듯 혼신을 다해

날랜 세상을 겨누다가, 무디어

멎어버린 아버지의 낡은 창

 

 

 

우리는 전생에 열목어熱目魚였나 보다

 

 

어찌, 제 속내를 다 드러내며 살까

앞앞이 못한 이야기 풍편에 떠도는

바람의 여울목 쑥밭재에 서면 눈물이 난다

신밭골 약초 캐던 외팔이 하씨*

늘 젖어 시린 가슴, 어쩌다 해거름에

남몰래 꺼내 말리다 보면

설운 마음에도 노을은 뜨거워 눈물은 났으리라

 

세상을 뜨겁게 바라보는 이

보이는 모든 것이 뜨거운 이

그리하여 뜨거워진 눈을 찬 눈물로 식혀야 한다면

전생에 그대도, 아마

차고 맑은 물에 눈을 식히던 열목어였나 보다

유정有情한 시인아! 생명주처럼 풀린 강물

흔들리는 청솔가지에도 눈물이 나고

저무는 멧부리 걸린 조각구름에도 눈물이 난다

! 우리는 전생에 열목어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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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팔이 하씨 : 지리산 빨치산으로 총을 맞아 팔 하나를 잃고 포로로 잡혀 옥살이를 했다. 석방되어 목숨을 부지한 것이 전우들에게 죄밑이 된다며 다시 지리산으로 돌아와 죽을 때까지 하산하지 않고 귀먹은 부인과 함께 신밭골에서 살았던 사람.

 

 

 

나비

  -랑탕히말 시아부로벤시에서

 

 

유채꽃 환한 이랑 사이

설산雪山을 겨누어, 한 치

딱 한 치 몸으로

우주를 다 가늠한 뒤

 

우화등선羽化登仙

 

한 방울 아침이슬도 무거워하는

저 작고 가벼운 자벌레 앞에

! 끝없는 탐욕의

불쌍한 내 몸뚱아리

 

 

                        *권경업 시집 별들이 쪽잠을 자고 간(도서출판 전망, 2004)에서

                                                             *사진 : 가을 설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