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안리의 겨울밤
눈 덮인, 구례군 산동면
위로 받고 싶은 위안리의 하얀 밤은
지난해, 이르게 피어
이르게 져버린 산수유꽃이
만복대 위에서 반짝입니다
압니다, 바라보면 눈 시린
지리산 언저리 저 잔별들은
그 이름 아직 부르기라도 하면, 아직도
뜨겁게 가슴 벅차오를 내 아버지 형제들의
애처롭게 스러져 간 눈망울이란 것을
♧ 잠자리
바람 속의 삶生에서
잠자리를 찾고 있는 너는
늘, 푸른 상소를 꿈꾸는
청빈하여 자유롭던 조선 선비의 화신
온 세상이 한 점 벼랑 끝인
잠자리의 잠자리
♧ 고물시계
내 딛음, 어린놈의 한 걸음을 위해
황량한 사냥터를 휘돌아오지만
늘, 빈손이나 다름없는 지친 하루
수렵시대에도 그랬을, 째깍째깍
쫓듯 쫓기듯 혼신을 다해
날랜 세상을 겨누다가, 무디어
멎어버린 아버지의 낡은 창槍
♧ 우리는 전생에 열목어熱目魚였나 보다
어찌, 제 속내를 다 드러내며 살까
앞앞이 못한 이야기 풍편에 떠도는
바람의 여울목 쑥밭재에 서면 눈물이 난다
신밭골 약초 캐던 외팔이 하씨*도
늘 젖어 시린 가슴, 어쩌다 해거름에
남몰래 꺼내 말리다 보면
설운 마음에도 노을은 뜨거워 눈물은 났으리라
세상을 뜨겁게 바라보는 이
보이는 모든 것이 뜨거운 이
그리하여 뜨거워진 눈을 찬 눈물로 식혀야 한다면
전생에 그대도, 아마
차고 맑은 물에 눈을 식히던 열목어였나 보다
유정有情한 시인아! 생명주처럼 풀린 강물
흔들리는 청솔가지에도 눈물이 나고
저무는 멧부리 걸린 조각구름에도 눈물이 난다
아! 우리는 전생에 열목어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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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팔이 하씨 : 지리산 빨치산으로 총을 맞아 팔 하나를 잃고 포로로 잡혀 옥살이를 했다. 석방되어 목숨을 부지한 것이 전우들에게 죄밑이 된다며 다시 지리산으로 돌아와 죽을 때까지 하산하지 않고 귀먹은 부인과 함께 신밭골에서 살았던 사람.
♧ 나비
-랑탕히말 시아부로벤시에서
유채꽃 환한 이랑 사이
설산雪山을 겨누어, 한 치寸
딱 한 치 몸으로
우주를 다 가늠한 뒤
우화등선羽化登仙
한 방울 아침이슬도 무거워하는
저 작고 가벼운 자벌레 앞에
아! 끝없는 탐욕의
불쌍한 내 몸뚱아리
*권경업 시집 『별들이 쪽잠을 자고 간』(도서출판 전망, 2004)에서
*사진 : 가을 설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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