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김정순 시집 '늦은 저녁이면 어때'의 시(4)

김창집 2022. 11. 6. 00:08

* 알꽈리 열매

 

휘묻이

 

 

마지막 노을이 기웃거린다

안개가 거들고 비가 거들어

그을린 시간들을 다듬지 못해

빈곤의 입들이 떨어져

뒹구는 저녁

 

어두운 하늘 머리에 이고

돌고 돌았던 맷돌 위에

들리는 바람 소리

손목을 아프게 긁는다

 

매운 연기 마시며

누렇게 바랜 마음

한 움큼 마당에 뿌리며

사시던 어머니

휘묻이 숨결 하나

줄기 아래 이어지는

삶을 기다리며

여린 뿌리 수십 리 먼 길

물길 따라 보낸다

 

치마폭에 꽃물 드는 소리에

배꼽 들낸 여린 흰 발들

 

 

*가막살나무

 

풍물 시장 1

 

 

시멘트 바닥 좌판 위로 남자의 능숙한 입담

무릎 땅에 대고 정수리 보이는 흥정들,

 

가는 손가락 튕기던 중고 기타는

길모퉁이 버스킹 여운이 아직 남아 있는지

천막 사이로 바쁘게 지나가는 구름 불러 모은다

 

나풀거리는 어제의 추억들이 웃고 있는 소품 골목,

어릴 적 추석 즈음의 온기를 지닌 놋그릇에

따뜻한 탕국 올려 좀처럼 식지 않던 제 그릇들

조상 앞에 예를 아는 주인을 마냥 기다린다

 

비집고 들어간 천막 아래 도토리 묵밥에

콩비지 국수,

양파 간장에 푹 찍은 부추전,

친구야, 막걸리 한잔하자

 

 

*좀작살나무

 

워싱턴야자

 

 

지념 하나가

남태평양을 돌아

방성*이 흐르는 연수 마을

야자 잎에 머물렀다

톱니로 베어내니 삐죽삐죽

솟아난 비하의 잎들

뿌리 더욱더 깊어

 

천공 두렵지 않다

셀 수 없는 시간이 굽이쳐

지나는 동안

키 더욱 자라

눈비에 젖으며

네가 오기를 눈 휘도록

발돋움하였다

 

먼 곳

머나먼 그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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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성 : 이십팔수의 넷째 별자리에 있는 별들.

 

 

*참빗살나무

 

영자

 

 

영자는 연어다

바다 속 침목 위를 떠돌던 연어다

하늘은 늘 젖어 영자의 저고리 마른날 없었다

뜨거운 가슴보다 차가운 바위로 서로 만났다

 

누가 봄 다음을 싱그러운 여름이라 했는가

길 이어가기 무섭게 가파른 길 나타나고

안으로 들어가면 마디마디가 속내를 드러내는

산길이다

 

강 냄새 기억한다

영자가 알고 있는 바람 냄새 기억한다

뒷문 열면 대숲이 노을 삼키는 소리 기억한다

 

지느러미 찢어지는 시간 속에서 막이 내린

무대는 황량하다

 

한 마리 늙은 연어가

강어귀의 겨울 시린 햇살 속으로

가슴 지러미 접는 소리

수면 아래 조용히 들리는 저녁이다

 

 

*덜꿩나무

 

매미

 

 

포도 잎 타는 냄새가 사라지면

부르던 노래마저 불러도 좋다

 

붉은 꽃술 품어 우는

무화과 젖은 눈썹 달래지 말고,

 

내가 너에게 여름이라 부르는 건

온몸을 적시는 땀방울 때문이

아니야

 

나뭇잎으로 몸을 숨기고

가혹한 기도로 구름을 지우며

잠깐의 시간에 울고 있는 너의 삶이

가는 불빛처럼 보였기 때문이야

 

포도 잎 타는 냄새 식으면

둥근 팬에 노랗게 잘 익은 호박전

가을 접시에 올려 함께 먹자

여름아

 

 

 

                       * 김정순 시집 늦은 저녁이면 어때(메이킹 북스, 2022)에서

                                             * 사진 : 요즘에 익은 열매들

 

 

*화살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