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월간 '우리詩' 11월호의 시(1)

김창집 2022. 11. 8. 00:34

 

 

들판이 적막하다 - 정현종

 

 

가을 햇볕에 공기에

익는 벼에

눈부신 것 천지인데,

그런데,

, 들판이 적막하다-

메뚜기가 없다!

 

오 이 불길한 고요-

생명의 황금 고리가 끊어졌느니-

 

 

 

안경알을 닦으며 조병기

 

 

어둠을 걷어 내고 밝음을 찾으러

안경알을 닦는다

그 너머 세상을 보려고

안경알을 닦고 또 닦는다

너무 밝아도 어지러워 눈이 부시고

너무 흐리면 이지러진 세상

저쪽에서 누군가 다가오지만

스치고 마는 얼굴 얼굴들

아무리 안경알을 닦고 또 닦아도

부질없음뿐인 것을

 

 

 

꽃도둑 - 나병춘

 

 

꽃이 도둑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가슴에 꽃을 달고 담을 훌쩍 뛰어넘어

나를 훔치러 와도 좋겠지

가시 손에 찔려 피 처얼철 흘리며

살려 달라 애원하겠지

잠든 척 몰래 누워있으면

이곳저곳에 향기를 뿌려놓고

꽃의 나라에 생포하여 데려갈 거야

꿀벌들이 닝닝거리는 꽃도둑의 나라

나도 꽃 한 송이 되어 도둑고양이처럼 숨어살 거야

꽃그늘에 누워 게으른 낮잠 즐기기도 하고

뱁새 솔새 딱새랑 더불어 꽃씨들을 훔쳐 먹으며

나도 도둑이 되고 말거야

창고에는 꽃씨들이 남실남실 넘쳐서

생쥐 날다람쥐들이 탐을 내겠지

그러면 나는 창고 문 활짝 열어놓고

맘껏 훔쳐가라 공고문을 써 붙일 거야

훔쳐가지 못한 씨앗들은 가랑비에 움이 터

헛간 마당은 금세 꽃밭이 되고 말겠지

꽃도둑이 훔쳐다놓은 물건들이

노랑 빨강 하양 꽃이 되어 피어난다면

온 동네방네 나비 벌들이 쳐들어오겠지

자기들과 꼭 닮은 도둑이 이웃에 산다고

희희낙락 즐거워하며 이삿짐 선물 싸들고 들락날락하겠지

, 그들이 가져다놓은 성냥 선물을 받아

밤새 불꽃놀이 할 거야

꽃들이 도둑이 되어 늘 내 곁을 두리번거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벌 나비들도 킁킁거리며 향기를 훔쳐가도록

나도 꽃 한 송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모래알의 노래 김혜천

 

 

눈 버리고

 

입 버리고

 

목구멍 버리고

 

허물고 허물어 말간 알이 되어야지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았기에 무엇이든 될 수 있는

 

혼돈의 바다는 분화의 터전

 

흐르다 흐르다

 

수풀 되고

 

버들치 되고

 

춤추는 별이 되어야지

 

 

 

적과 흑 고두현

 

 

낮에는 밤을 섬기고

밤에는 낮을 섬기며

 

밀실 속에 광장을 가두고

노래 속에 혀를 가두며

 

몰락한 왕조의 기둥 아래

붉은 뒷배를 감추느라

 

얼굴 두껍고 속 시커먼

후흑厚黑까지 섬기다니.

 

 

                                            *월간 우리202211월호(통권 413)에서

                                            *사진 : 끝물 단풍(2022. 11. 6. 사려니 숲길 주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