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려했던 절 수정사
고려 말에서 조선 중기에 이르기까지 제주 3대 사찰의 하나로 불릴 만큼 화려했다는 수정사(水精寺)는 해체되고 멸실되어 오늘날은 그 자취조차 더듬기 힘들다.
그러나 ‘태종실록’ 8년(1408) 2월 정미(28일) 기사 내용을 보면, ‘의정부에서 제주의 법화사와 수정사 두 절에 있는 노비수를 정하도록 아뢰었다. “제주목사의 정문(呈文)에 따르면, 주경에 비보사찰(裨補寺刹)이 두 곳에 있는데, 수정사에는 현재 노비가 130인이 있고, 법화사에는 280인이 있다고 합니다. 바라건대 두 절의 노비를 다른 사찰의 예에 의하여 각각 30인만 주고, 그 나머지 382인은 전농(典農)에 부치십시오.” 하니, 그대로 따랐다.’고 나온다.
거기다 충암 김정(金淨)의 ‘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 1520)에는 ‘원나라 시대의 유물로서 우뚝 높이 서서 홀로 남아 있는 것은 오직 도근천의 수정사뿐’이라는 내용이 있다. 그러던 것이 김상헌(金尙憲)의 ‘남사록(南槎錄, 1601)’에 가면, ‘초가 두어 칸이 바람과 비를 가리지 못할 정도였다.’고 나온다. 그리고 이익태(李益泰) 목사는 ‘지영록(知瀛錄, 1694)’에 ‘폐사된 도근천 근처의 절에서 재료를 실어다가 연무정을 수리케 했다.’고 썼다.
그래서 이영권은 ‘제주역사기행(2004)’에서 이 기록들을 근거로 ‘수정사는 몽골 지배 시기인 고려 말에 창건되어 번영을 누리다가, 조선 초기에 급격하게 쇠퇴하기 시작했고, 17세기 말에 와서는 완전히 폐사된 것으로 추정’했다.
□ 납세미물과 수정사지
수정사지 안내판에 따르면 ‘지표조사와 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절터는 남북 120~150m, 동서 50~60m 규모이며,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유구는 3단으로 이루어진 축대, 문루를 포함한 건물지 12동, 도로, 보도, 탑지, 석등지, 담장지, 폐와무지, 적석시설물 등이다. 출토된 유물은 명문기와, 막새, 송원대 청자와 백자, 11세기 순청자, 향로 등의 청자류, 조선청자와 백자, 사리함과 장신구, 화폐 등이 있다.’고 썼다.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옛날 수정사의 납자(衲子, 수도자)들의 먹었다는 납세미물을 복원하였고, 절터 일부와 그 주변은 길 양쪽으로 나누어 제77호 어린이 공원을 조성, 활용하고 있다. 그리고 마을에서는 어린이공원 안에 있는 절물도 복원하여 그 유래를 새겼다.
절물은 물방울이 번지는 모양을 본 따 원이 몇 겹 둘러싼 모습으로 장식하고, 거기다 허벅을 진 여인의 모습을 설치해서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묘한 감흥을 준다. 거기서 흘러나온 물을 아래쪽에 모아 연못을 조성하고 비단잉어를 몇 마리 들여 놓았는데, 그들만이 제 세상인 양 수정처럼 맑은 물속을 유유히 돌아다니고 있다.
□ 기대를 저버린 벽화거리
벽화거리는 애당초 구상을 하지 않음만 못했다. 어차피 그림을 그려놓을 벽면이 녹록치 않은데다가 차를 세워놓아 어렵게 그려놓은 그림마저 구경할 수가 없다. 벽화가 잘 그려져 있는 곳을 가보면 옛날 차가 다니기 힘들 정도로 좁은 골목 같은 곳, 높이도 있고 기다란 울타리가 이어져 있는 곳, 그리고 건물 벽면이 길가로 드러나 창문이 없는 곳들이어야 그래도 그림이 들어갈 자리가 될 테니까.
그리고 그림도 수준도 있고 그 마을만의 전통이나 상징성이 드러나야 좋은데, 예산도 적은 데다 준비 기간도 짧다 보니 연속성도 없고, 좋은 작품이 나오기 힘들다. 차제에 이런 길이나 거리를 기획하는 분들에게 제안을 드린다면, 제발 일회성으로 그치지 말고 제대로 운영될 수 있도록 해달라는 부탁이다. 한 번 만들었으면 마을 사람들 모두가 관심을 갖고 마을 예산을 들여서라도 지속적으로 보완하여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다 보면 자연히 좋은 마을로 알려지게 될 테니까.
□ 마이못에서
옛길을 따라 수정동 표지석에서 길을 건넌 뒤 연대마을로 들어서다 보면, 국립수산과학원 제주수산연구소를 지나자마자 ‘마이못’이라는 안내판과 마주하게 된다. 말의 귀를 닮았다고 해서 붙은 마이못은 1970년대까지 지역주민들의 음용수를 제공해주던 마을의 근원이다. 지금 물이 나오는 곳은 ‘가막샘’이란 표지판이 붙고, 두 칸으로 된 곳은 위쪽이 채소를 씻는 곳이고 아래쪽은 빨래를 하는 곳으로 보인다.
밀물이 밀려오면 바닷물이 올라와 이 못에서 나오는 민물과 합치는 기수역에 해당되는 해안습지다. 밀물 때와 썰물 때에 따라 염분의 차이가 불규칙하기 때문에 독특한 해안습지의 특성을 갖고 있어 생물종의 다양성을 보인다. 따라서 어린 생물들이 성장하는 터전이 되면서 숭어나 민물장어 등이 자라고 고니와 같은 희귀 철새를 자주 볼 수 있다고 한다.
□ 마을 이름이 된 연대(煙臺)
전에 찾았던 동네와 달리 현대식 높은 건물이 들어서서 서편에 자리한 조부연대를 찾는데 애먹었다. 섬 전체 해안 38곳에 설치되었다고 하는 조선시대 방어유적 연대는 오름 위에 설치하는 봉수와 달리 돌로 높이 쌓아올려 멀리서도 잘 보여야 했다.
중간에 마을 사람들이 연대 위에 시멘트로 구조물을 만들어 정자처럼 사용하다가 2008년 경에 이를 헐고 원상태로 복원했다. 그 규모는 아랫부분 6.6m×4.7m, 윗부분 6.5m×5.1m, 높이 2.3m 정도인데, 거친돌 허튼층쌓기이다. 연대 이름인 ‘조부(藻腐)’는 ‘듬북’의 한자 차용 표기(오창명, 1998)로 보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수근연대(6.9km), 서쪽으로는 남두연대(6.9km)와 교신했다고 한다.
해안가로 나오는 길은 나무로 다리를 놓고 방파제에 오래 갈 수 있도록 그림을 새겨 넣어 산뜻한 느낌을 준다. 용암이 흘러내려 이루어진 바닷가와 그 위에 자라는 생물들까지 퍽 조화로운 풍경이 물길의 대미를 장식해 지금까지 걸어온 수고로움에 보답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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