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개망초 – 이규홍
남한강 둑방 따라
하얗게 핀 들꽃 무리
바람에 흩날리고 있다
망초, 누가 지은 이름이기에
이다지도 불경스러운가
망할 놈의 시국이라니
얼마나 절망 깊었기에
날마다 하얗게 쓰러져야만 하는가
쓰러져도 다시 일어서는 것이
없이 사는 사람들의 삶
어디에 살든 절망에
쉽게 주눅들지 마라
희망의 가지 늘어놓고
온종일 빙그레 웃고 있는
이웃사촌 같은 꽃
찬바람 불 때마다
꼭 안아주고 싶다

♧ 시간 - 도경희
이슬 터는 새벽
소풀*을 벤다
손에 감기는 어리어리한 풀이
소쿠리에 수평으로 눕는다
시퍼런 날에 드러난 보얀 밑동
천사들처럼 상처가 저절로 치유된다
열흘이면 본살 같이 아물어
몸을 또 내어 줄 것이다
초록 실로 공단을 짜던
야트막한 밭에
풀무치가 흘려놓은 숨결
고운 흰구름이 된다
---
*부추의 방언.

♧ 첫새벽 – 방순미
북암령 무릎까지 차오른 눈
한 땀 한 땀 바느질하듯
걸어서 시침질
밤새도록 꿰맨
삐뚤삐뚤한 능선
이불 삼아 덮은 산속
차갑고 어두운 밤
별만이 따뜻한 하늘 바라보며
다시 올 희망처럼 기다리는 여명

♧ 홍시 – 이진환
툭,
떨어져
서산을 물들인
홍시
마른 침 삼키며 바라보는
홍 씨네 할매
어쩌나 어쩌나
떨어질까
까맣게 속 타는
저,
노을

♧ 다시 운주사에서 - 김용태
참 무량도 했을 것입니다, 당신
밤은 깊은데
예나 지금이나
수컷의 일이란 바람 같은 것
눈길을
먼발치에 두고
졸인 가슴으로
꺼칠해진 골목에서
서성거렸을 것입니다, 당신
이 저녁, 나는
꽃 진 목련 나무 아래서
긴 허물을 벗기 위해 몸을 꺾는데
천만번 생을 돌면 다시 닿을까
눈먼 육신 벌서 듯
촉수 늘이어 헤매다
나란히 와불 되어 눕고도 싶었을 겁니다, 당신
헐겁고 때론 모진 연이
스쳐 지난 바람처럼, 이젠
그림자마저 찾을 길 없고
어둠뿐인 달의 뒤편을
속절없이 거닐다
어디에선가
축생으로라도 윤회를 빌며
기다리는 그 속이
참으로 무량도 했을 것입니다, 당신
아직 아침은 멀고
채 벗지 못한 허물이
허리 아래 있습니다
* 월간 『우리詩』 1월호(통권 제415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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