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계간 '제주작가' 2022년 겨울호의 시(3)

김창집 2023. 1. 16. 00:20

 

 나쁜 기적 - 서안나

 

 

누가

꽃 속에

비련을 풀어두었나

 

나팔꽃이 활짝 피지 않는다

아픈 아버지처럼

 

벌레가 잎사귀를 다 먹어

아버지의 폐 시티처럼

핏줄 같은 그물맥만 남았다

아버지도 그랬다

아침이 되면

나팔꽃처럼 벌떡 일어나실 것만 같았다

 

벌레가 잎사귀를 먹는 동안

꽃은

어떤 생각으로

아버지는 어떤 눈길로

죽음이 먹물처럼 번져가는

당신의 몸을 바라보았을까

 

저녁나절 저승의 고요를

보랏빛 핏줄 선

손등으로 두드리는

나팔꽃

 

아프다는 건 절벽 같은 것

없는 손이 그린 함정 같은 것

 

나팔꽃 지는 저녁은

떠나가는 사람 뒤에서

멍이 들도록 손을 움켜쥐는 것

 

 

 

모충사 김항신

     -돌탑 타임캡슐

 

사라봉 길

긴 시간 동안 묻혀 지낸 세월

주변은 덧없이 무던히 다니면서

여기, 오늘 처음으로 와본다

그 숱한 세월 동안 왜 그랬을까

묵묵히 다녔을 뿐인데

이럴 수가 있었나

그럴 수도 있겠지

내가 나에게 말하고 답하며

내가 나에게 질책을 느끼며

 

의지와 상관없이 발걸음은 더뎌지고

 

‘200111일 묻어둔 역사 타임캡슐

300111’,

그 때면 알 수 있을까

 

까무룩 한 한 세월 천년

 

 

 

11월에 비를 기다리는 사람은 문무병

 

 

입동 무렵에 늦가을의 하얀 소식 같은 비가

먼 데서 당신이 오는 발자국 같은 비가

눈도 아니고 바람도 아닌 작은 의미를 담은

추적추적 코트 자락 흔들며

늦가을 가랑비가 손짓을 하면

무언가 변신을 준비하라는

그냥 있어도 들려온다는

하해 같은 마음을 담은 비가

마음 좋게 오지만 그럴수록

한라산의 안개도 털고

내 마음도 씻고 몸도 씻고

아름다운 뜰과 따뜻한 햇빛도

겨울비와 안개도 쉬어 낭만적인 분위기를 만들고

모두가 좋아하는 제주

제주의 아흔아홉 골자기와 나의 사랑도 보태

백록담(白鹿潭)표 백()을 담은

제주 사랑을 조금씩 그려본다.

늦은 가을에

 

 

 

잔치 커피 양동림

 

 

쓰디쓴 맛도

이것저것 버무려

달달하게 만들고

검은 색깔도 하얀 가루 섞어

검은 듯 희게 하고

 

슬픔마저 싹 잊고

조문객들을 배웅하는

잔치 커피

 

그래 고인은 좋은 세상으로 잘 가실 걸세!

함께 나누는

달달한 향기

잔치 커피

 

 

 

세연교 문경수

    -정수에게

 

 

손잡지 마 옷을 잡아야 살점이 안 무너져

사람이 사람일 수 있도록 망가지지 않도록

 

한 발 다가가면 섬 뒤로 숨는 작은 무지개 같은 건 아예 등져버리고 나는 돌아서련다

한 발짝만 움직여도 한 아름 안기는 맑고 흰 빛 덩어리 쪽으로

사람이 사람일 수 있도록 망가지지 않도록

 

가족들은 다리 위에서 저 먼 바다에 저마다 머금던 슬픔을 투망하고

깨진 무지개, 그 파편에 찢긴 옷, 윤곽만 남은 사람을 테트라포드 위로 건져 올린다

 

두 눈을 감는다

사람이 사람일 수 있도록 망가지지 않도록

 

 

           * 계간 제주작가2022년 겨울호(통권79)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