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레길 돌담 너머 삼대 기와집 – 양순진
어느 날 문득 돌담 너머 미국자리공 무성한 고향집 뒤편을 지나친다 좀팍 모양의 녹남봉 아래 기와집과 슬레이트집이 나란히 있고 넓은 마당과 외양간, 돼지우리가 있던 집 뒤뜰엔 감나무와 귤나무가 있어 가을이 참 풍성하던 그 바끄레 안끄레집에서 할머니와 할아버지, 어머니 아버지와 팔남매, 그렇게 삼대가 등나무처럼 얽혀져 살았다 아직도 정지에서 감자 삶고 오메기술 빚던 어머니 모습이 굴뚝연기처럼 피어오른다 집 뒤편으로 올레길이 생겨났지만 지금은 텅 빈 집 모두 고향 집 떠나 뿔뿔이 흩어져 산다 세월을 증명해주는 낡은 기와와 오빠가 심어놓은 종려나무와 동백나무, 그리고 워싱턴야자수가 돌담 안에 갇혀 하늘 높이 치솟고 있을 뿐 희한한 건 기와는 낡아가지만 돌담은 점점 단단해지고 기억은 더 생생해진다는 것
♧ 할머니의 꿈 – 김대운
높은 사람 되라는 할머니 말씀
눈물을 삼키며 상처를 견딘 이에게는 진실이다
고대하던 아들을 낳자마자
태평양전쟁으로 밥그릇 빼앗기고
나무 심으러 산에 갔다가
이유 없는 돌에 맞아 비명에 간 막내딸
월남전 정글에서 사라져 돌아오지 못한 사위
할머니의 가슴은 까맣게 익은 포도가 되었다
다서 남매 살리려고 밭고랑에서
가슴에 독을 내뿜으며 땀범벅이 되고
흙 묻은 옷을 맨손으로 돌판에서 수만 번을 비볐던 할머니
남은 것은 수백 년 된 소나무 껍질 같은 괭이진 손
시집 와서 60여 년
슬픔과 원한 지친 몸과 병든 육체
서럽고 외로운 밤이 되면
투박한 항아리에 있는 막걸리를 먹고
신음소리와 함께 새우잠으로 지새운다
잠을 못 자서 사나운 꿈만 구셨는지
매일 조심하라는 할머니!
높은 사람 되어야 한다는 말씀
현재도 머릿속에서 혼란스럽다
먼 훗날 손주가 꿈을 묻는다면
♧ 바람개비 – 김정희
하늘을 향해 활시위를 당긴다
바람을 쥐고 당겨서
옷을 벗고도 당당하게 살아가던
태고의 시간으로 날아간다
밥을 짓고
옷을 짓고
집을 짓던
얼마나 정성스러웠을까
화살촉의 끝처럼 매서운 눈초리가
겨울을 뚫고 온다
♧ 외로운 여정 - 김항신
어느 슬픈 날에 곤을동 길 걷고 있었다
티브이 화면에서처럼 생생한 뉴스가 떠날
줄 모르는 시간,
나는 보았다 그녀의 슬픔을
“이봐요 어디 있을까요
여기도 없나 봐요
누가 본 사람 없나요”
어쩌면 좋아 오늘 하루도 저무는데
이역만리
돈 따라 난파선에 오른 가장의 최후 애잔하다
♧ 경계근무 이상 무 – 문용진
-나팔꽃이 피었습니다
고슴도치가 한껏 부풀린 몸처럼 둥글다
날선 것들로 둥글게 이어진 철조망의 경계
바람과 풀씨만이 암호도 없이 드나든다
바람 든 것들, 말릴 재간이 없다
철조망을 기어오르는 연초록 손가락
한참을 수색하듯 더듬거리더니
아침마다 기상나팔을 분다
청보라 빛으로 깨어나는 최전방
* 한라산문학동인회 간『태초에 한라산은 활화산이었네』2022 제35집에서
'문학의 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월간 '우리詩' 2023년 1월호의 시(3) (0) | 2023.01.23 |
---|---|
유종 시집 '푸른 독을 품는 시간' 발간 (1) | 2023.01.21 |
'동백문학' 2022년 제2호의 시(1) (1) | 2023.01.19 |
'한수풀문학' 2022년 제17호의 시(5) (0) | 2023.01.18 |
'혜향문학' 2022년 하반기호의 시(3) (0) | 2023.01.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