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한라산문학' 2022 제35집의 시(2)

김창집 2023. 1. 20. 00:02

 

 

올레길 돌담 너머 삼대 기와집 양순진

 

 

  어느 날 문득 돌담 너머 미국자리공 무성한 고향집 뒤편을 지나친다 좀팍 모양의 녹남봉 아래 기와집과 슬레이트집이 나란히 있고 넓은 마당과 외양간, 돼지우리가 있던 집 뒤뜰엔 감나무와 귤나무가 있어 가을이 참 풍성하던 그 바끄레 안끄레집에서 할머니와 할아버지, 어머니 아버지와 팔남매, 그렇게 삼대가 등나무처럼 얽혀져 살았다 아직도 정지에서 감자 삶고 오메기술 빚던 어머니 모습이 굴뚝연기처럼 피어오른다 집 뒤편으로 올레길이 생겨났지만 지금은 텅 빈 집 모두 고향 집 떠나 뿔뿔이 흩어져 산다 세월을 증명해주는 낡은 기와와 오빠가 심어놓은 종려나무와 동백나무, 그리고 워싱턴야자수가 돌담 안에 갇혀 하늘 높이 치솟고 있을 뿐 희한한 건 기와는 낡아가지만 돌담은 점점 단단해지고 기억은 더 생생해진다는 것

 

 

 

할머니의 꿈 김대운

 

 

높은 사람 되라는 할머니 말씀

눈물을 삼키며 상처를 견딘 이에게는 진실이다

 

고대하던 아들을 낳자마자

태평양전쟁으로 밥그릇 빼앗기고

나무 심으러 산에 갔다가

이유 없는 돌에 맞아 비명에 간 막내딸

월남전 정글에서 사라져 돌아오지 못한 사위

할머니의 가슴은 까맣게 익은 포도가 되었다

 

다서 남매 살리려고 밭고랑에서

가슴에 독을 내뿜으며 땀범벅이 되고

흙 묻은 옷을 맨손으로 돌판에서 수만 번을 비볐던 할머니

남은 것은 수백 년 된 소나무 껍질 같은 괭이진 손

 

시집 와서 60여 년

슬픔과 원한 지친 몸과 병든 육체

서럽고 외로운 밤이 되면

투박한 항아리에 있는 막걸리를 먹고

신음소리와 함께 새우잠으로 지새운다

 

잠을 못 자서 사나운 꿈만 구셨는지

매일 조심하라는 할머니!

높은 사람 되어야 한다는 말씀

현재도 머릿속에서 혼란스럽다

 

먼 훗날 손주가 꿈을 묻는다면

 

 

 

바람개비 김정희

 

 

하늘을 향해 활시위를 당긴다

바람을 쥐고 당겨서

옷을 벗고도 당당하게 살아가던

태고의 시간으로 날아간다

 

밥을 짓고

옷을 짓고

집을 짓던

 

얼마나 정성스러웠을까

화살촉의 끝처럼 매서운 눈초리가

겨울을 뚫고 온다

 

 

 

외로운 여정 - 김항신

 

 

어느 슬픈 날에 곤을동 길 걷고 있었다

티브이 화면에서처럼 생생한 뉴스가 떠날

줄 모르는 시간,

나는 보았다 그녀의 슬픔을

 

이봐요 어디 있을까요

여기도 없나 봐요

누가 본 사람 없나요

 

어쩌면 좋아 오늘 하루도 저무는데

 

이역만리

돈 따라 난파선에 오른 가장의 최후 애잔하다

 

 

 

경계근무 이상 무 문용진

    -나팔꽃이 피었습니다

 

 

고슴도치가 한껏 부풀린 몸처럼 둥글다

날선 것들로 둥글게 이어진 철조망의 경계

바람과 풀씨만이 암호도 없이 드나든다

바람 든 것들, 말릴 재간이 없다

철조망을 기어오르는 연초록 손가락

한참을 수색하듯 더듬거리더니

아침마다 기상나팔을 분다

청보라 빛으로 깨어나는 최전방

 

 

    * 한라산문학동인회 간태초에 한라산은 활화산이었네2022 35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