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유종 시집 '푸른 독을 품는 시간' 발간

김창집 2023. 1. 21. 01:33

 

 

시인의 말

 

 

살면서 삼 일을 넘지 못한 작심作心

을 다하면 못해도 내 적막에 닿는

숲길 하나쯤 내지 않았을까

오래 입었던 푸른 작업복을 그 작년 벗은 것 외

나를 증명해 보이고 싶었던 것들……

거의 잊거나 떠나보냈으나

, 아직까지 놓지 못하고 있으니 애처롭다

호롱불처럼 흔들리던 불면의 밤들

비로소 밖으로 내몬다

부끄러움은 온전히 나의 몫이리라

 

 

 

푸른 독을 품는 시간

 

 

부족한 시간 보충하려

시간 밖에서 시간을 때우고 있었지요

기름밥 땀나게 먹던 시절은

사실 푸른 독 데쳐 먹던 날들을 이어 붙인 것 같았지요

시간 밖에서 시간을 끼니처럼 때우던 푸른 시절은

우리밖에 부를 수 없는 흘러간 유행가 같아

늘어진 빨랫줄에 매달린 낡은 작업복 같아

곰곰이 되짚었어요 결함을 찾을 때까지

몇 번을 되짚어가다 꼬박 날 샜던 것처럼

어떤 겨울날은 시간 위에 시간을 껴입었어도

원인불명으로 기록되었지요

그런 날은 차라리 냉정하게 모든 원인을 짓이기고 싶었어요

시간 밖에서 공복을 달래는 술병이 적금

깨서 탕진한 눈물 같았어요

인과는 우리와 아무런 관계없는 것처럼

무심하게 흐르더군요

지금은 한 시절 철로 위를 걷던 동지들에게

손 내밀어야 해요

푸르게 눈 뜨던 시간 푸르게 빛나던 출발신호기와

푸른 작업복과 시간 밖 푸른 청춘에게

알맞게 데쳐져 입맛 다시던 푸른 독들에게

이제 안녕 작별의 손 내밀어야 해요

이제 안녕

 

 

 

그림자놀이

 

 

제 엄마 그림자 좇는 아이

엄마 몸속에서 쑥 고개 내밀었다

다시 들어가는 아이

그림자는 어디서 왔어?’

몸속을 빠져나와 묻는 아이

그림자는 왜 까매?’

제 옷 쳐다보는 아이

그림자에게 푸른 옷 입히고 싶은 아이

, , , , , , 보 색칠하고 싶은 아이

그림자를 발로 차는 아이

내 손 툭툭 차고 뱃속에서 놀았던 아이

나를 운동장 밖으로 차버리고 싶은 아이

왜 그림자는 밤에 없어져?’

숨어 우는 울음소리가 궁금한 아이

고독한 영혼을 벌써 배우고 싶은 아이

그림자를 나보다 길게 늘일 줄 아는 아이

너무 빨리 크는 아이

 

 

 

월선리

 

 

물병자리에서 물이 쏟아지는데 저수지는 왜 마를까

겨울새가 배롱나무 가지에서 우네

예전 사랑을 고백한 사내는 말문을 닫았다는데

유형지流刑地에 탁란하고 문고리 거는 여인들

 

사내 영혼 건져 말뫼봉에 가둘 때

죽은 사람은 산 사람에게 눈물을 구걸하지 않았는데

누가 그의 눈물을 건져 올릴까

 

겨울새는 어떻게 여름을 건너갈까

옛 얘기에 끌려가는 늙은 여자들과 갓난아기

아비는 어디에 있나

 

혁명을 위해 동네에 숨어들었다던 김일성종합대학 나온

사내는 죽고

전근대적 삶이 지겨웠던 사내는 물속을 걷고 있는 여름날

사의 찬미 부르는 이들이 무덤가에 현대적인

삶을 이식하는

 

 

 

옛날 사진*

 

 

눈이 푹푹 쌓여

햇볕에 반짝거렸겠다.

시린 손 호호 불며

눈싸움했겠다

 

그러다

배고픔도 잠시 잊었겠다

 

버들가지 옆으로 졸졸졸

개울물도 흘렀겠다

논두렁 둑새풀 하얀 눈 밑에서

푸르렀겠다

 

눈 사진 찍다

쳐다본 푸른 하늘

좀 슬프기도 했겠다

 

복실이 새끼마냥 앙앙거리다

어쩌면 먼저 간 아이도 함께

그렇게 나란히 배 내밀고

눈 쌓인 날

사진 한 장 꾹 찍었겠다

 

아직

녹지 않은 사진 속 하얀 눈

빨개진 볼을 보면

손이 시려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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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복 시인의 봄비이미지를 빌렸음.

 

 

          *유종 시집 푸른 독을 품는 시간(도서출판 b,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