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권 – 백용천
어색한 단풍 나들이
네팔에 없는 감시 카메라 배경이 돼 들어가는 길
사람과 걸은 적이 없는 길
여성 이민자는 등록이 없는 소처럼 걸어 다녔다
여권이 없는 불법체류자들은 따라잡을 수 없는 숲길을 탈출로 염두해,
끼리 주말을 정당하게 하게 대우해 주는 식당 이야기로 물들인다
소송할 수 없는 처지에 있는 눈은 소 눈처럼 흰자위가 검어진다
지구 반 돌아도 이해되지 않는 선진국 이야기,
하얀 권위 앞에 하얗게 밤새우지만 소리치지 못하는
등록되지 신체 차이, 불법 노동시간과
추행이 더해지는 일지, 미래를 접은 오랜 발걸음은
가족사진을 만지작거리는 것 같다
여권 없는 산책로는 흰자위만 고장난 지구본처럼 맥없이 돈다
♧ 어쩌라고 – 부정일
시를 생각하다가 잠들면 꿈이어도
이런저런 생각이 스쳐
영도 써보고 정도 써보고 하는데
잠 깨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지
젊었을 땐 꿈이어도
잠깨면 잊는다는 걸 알아
자다가 일어나 꿈에 쓰던 걸
옮겨 보기도 했는데
이젠 그런 일도 없네
분명 간밤에도 가슴 치는 울림 같은 걸
명필이 순간에 한 획 휘갈기듯
써본 것도 같은데
외통수에 걸린 장기판처럼
아무리 쥐어짜 봐야
생각이 나지 않으니
헛웃음만 나오네
어쩌라고
♧ 흠모합니다 – 송인순
밤새 무슨 일이 있었나요?
활짝 핀 보랏빛으로
아침 이슬이 눈물 되어
꽃잎 안에 맴돌지도 못한 채
또르르 떨군다
품었던 마음
밤새 기다림으로 지친 새벽녘
시린 마음에
아픈 상처로 덧날까
화려한 넝쿨장미 가시가 되어
너를 지켜주고 싶다
♧ 신성한 숲 – 양대영
소나기 지나가고
다시 숲을 향해 걷고 있다
좌우로 삼나무 펼쳐지고
때죽나무 산딸나무 편백나무
말없이 뒤따라온다
하얀 우비는
젖어버린 나비의 날갯짓인가
어두운 저편에서
신령이 나타날까
두려움 반 기쁨이 반인데
목마름을 달래듯
나뭇잎에서 툭 떨어지는 빗물
한 방울
♧ 아날로그 방식으로 - 양순진
아날로그와 디지털 뜻이 뭐냐던 아버지에게 아버지 삶의 방식은 아날로그 제 삶의 방식은 디지털입니다 그렇게 초간단으로 답변했지요 컴퓨터 자판 대신 알동네 굴뭇밭 일구고 핸드폰 숫자 대신 손글씨로 막내딸에게 편지 쓰던 아버지 아버지 나이 되어 보니 디지털이란 것, 부질없습니다 도무지 마음 붙일 곳 없습니다 흙 갈아엎고 아버지의 땅에 보리 유채 심던 아버지처럼 디지털 갈아엎고 제 생애도 아날로그꽃 심습니다
♧ 찰나 – 조선희
설거지를 하고 있지 않았겠소
수돗물이 부수처럼 내리는데
비집어 들어온 무지개가 눈앞에 뿌려졌소
핏빛 선 눈이 개운해지며 머릿속 지끈거림이 사라졌소
무지개가 타고 올라가는 햇살을 쫓아 눈길을 주었더니
온 세상이 빛나고 있지 않겠소
당겨진 신경이 울대를 타고 올라오며
가슴속이 치받쳐 올라왔소
홀가분함이 나를 에워쌌소
꽃 속에 파묻힌 듯
황홀경이었소
♧ 차귀도遮歸島 - 최원칠
정처定處 없는 그대여
볼레기 언덕으로 와요
하얀 무인등대 아래
퍼렇게 멍든 고구마 순
심고 사시게요
가쁜 가슴은
내려놓고 오세요
다시는
돌아보지 말고
돌아갈 길 없는
차귀에서 살아요
* 한라산문학 제35집 『태초에 한라산은 호라화산이었네』(2022)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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