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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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문학 제35집 '태초에 한라산은 활화산이었네'의 시(3)

김창집 2023. 1. 26. 02:01

 

 

여권 백용천

 

 

어색한 단풍 나들이

네팔에 없는 감시 카메라 배경이 돼 들어가는 길

사람과 걸은 적이 없는 길

여성 이민자는 등록이 없는 소처럼 걸어 다녔다

여권이 없는 불법체류자들은 따라잡을 수 없는 숲길을 탈출로 염두해,

끼리 주말을 정당하게 하게 대우해 주는 식당 이야기로 물들인다

소송할 수 없는 처지에 있는 눈은 소 눈처럼 흰자위가 검어진다

지구 반 돌아도 이해되지 않는 선진국 이야기,

하얀 권위 앞에 하얗게 밤새우지만 소리치지 못하는

등록되지 신체 차이, 불법 노동시간과

추행이 더해지는 일지, 미래를 접은 오랜 발걸음은

가족사진을 만지작거리는 것 같다

여권 없는 산책로는 흰자위만 고장난 지구본처럼 맥없이 돈다

 

 

 

 

어쩌라고 부정일

 

 

시를 생각하다가 잠들면 꿈이어도

이런저런 생각이 스쳐

영도 써보고 정도 써보고 하는데

잠 깨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지

젊었을 땐 꿈이어도

잠깨면 잊는다는 걸 알아

자다가 일어나 꿈에 쓰던 걸

옮겨 보기도 했는데

이젠 그런 일도 없네

분명 간밤에도 가슴 치는 울림 같은 걸

명필이 순간에 한 획 휘갈기듯

써본 것도 같은데

외통수에 걸린 장기판처럼

아무리 쥐어짜 봐야

생각이 나지 않으니

헛웃음만 나오네

어쩌라고

 

 

 

 

흠모합니다 송인순

 

 

밤새 무슨 일이 있었나요?

 

활짝 핀 보랏빛으로

아침 이슬이 눈물 되어

꽃잎 안에 맴돌지도 못한 채

또르르 떨군다

 

품었던 마음

밤새 기다림으로 지친 새벽녘

시린 마음에

아픈 상처로 덧날까

 

화려한 넝쿨장미 가시가 되어

너를 지켜주고 싶다

 

 

 

 

신성한 숲 양대영

 

 

소나기 지나가고

다시 숲을 향해 걷고 있다

 

좌우로 삼나무 펼쳐지고

때죽나무 산딸나무 편백나무

말없이 뒤따라온다

 

하얀 우비는

젖어버린 나비의 날갯짓인가

 

어두운 저편에서

신령이 나타날까

두려움 반 기쁨이 반인데

 

목마름을 달래듯

나뭇잎에서 툭 떨어지는 빗물

한 방울

 

 

 

 

아날로그 방식으로 - 양순진

 

 

아날로그와 디지털 뜻이 뭐냐던 아버지에게 아버지 삶의 방식은 아날로그 제 삶의 방식은 디지털입니다 그렇게 초간단으로 답변했지요 컴퓨터 자판 대신 알동네 굴뭇밭 일구고 핸드폰 숫자 대신 손글씨로 막내딸에게 편지 쓰던 아버지 아버지 나이 되어 보니 디지털이란 것, 부질없습니다 도무지 마음 붙일 곳 없습니다 흙 갈아엎고 아버지의 땅에 보리 유채 심던 아버지처럼 디지털 갈아엎고 제 생애도 아날로그꽃 심습니다

 

 

 

 

찰나 조선희

 

 

설거지를 하고 있지 않았겠소

수돗물이 부수처럼 내리는데

비집어 들어온 무지개가 눈앞에 뿌려졌소

 

핏빛 선 눈이 개운해지며 머릿속 지끈거림이 사라졌소

무지개가 타고 올라가는 햇살을 쫓아 눈길을 주었더니

온 세상이 빛나고 있지 않겠소

 

당겨진 신경이 울대를 타고 올라오며

가슴속이 치받쳐 올라왔소

 

홀가분함이 나를 에워쌌소

꽃 속에 파묻힌 듯

황홀경이었소

 

 

 

 

차귀도遮歸島 - 최원칠

 

 

정처定處 없는 그대여

볼레기 언덕으로 와요

하얀 무인등대 아래

퍼렇게 멍든 고구마 순

심고 사시게요

가쁜 가슴은

내려놓고 오세요

다시는

돌아보지 말고

돌아갈 길 없는

차귀에서 살아요

 

 

      * 한라산문학 제35태초에 한라산은 호라화산이었네(2022)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