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유종 시집 '푸른 독을 품는 시간'의 시(2)

김창집 2023. 1. 27. 00:21

 

절명

 

 

나락에 떨어져도 기어오르지 않으리라

바닥을 몇 번 헛짚었는가

13층에서 12층으로 11층으로

끊임없는 허공의 비웃음

초점 잃은 눈들이 벗어놓은 희망 다시 잡고 싶지 않아

타인의 피로 덤처럼 얹히는 며칠 치 삶 구역질해서

토하고 싶어

눈알도 심장도 똥구멍도 연민도 밖으로 내동댕이치고 싶어

 

11층에서 지상으로……,

기어코 땅속에 파묻혀

어제 손 놓아버린 청년 옆에 순장되고 싶어

흙 속에서 잘 탈골되고 싶어

침대 모서리에서 수십 번 뒤적거렸던

*의 죽음이 부러웠던 것은 혁명의 열정보다

볼리비아에서 몇 발의 총탄으로 절명했던 것

체처럼 붉은 피 콸콸 쏟으며 절명하고 싶어

 

눈감으면 벽을 타고 흐르는

저 울음소리 손 내밀고 싶지 않아

밤마다 눈 감고 싶지 않아

지상에서 지하로 암흑 속으로

오늘 밤에는 기어오르지 않으리라

누군가 웃으며 나에게 독주 한잔 권했으면

마지막으로 웃어주며 로비에 전시되던 풍경에 안녕

투명한 손 흔들며 독주 한 잔 꿀꺽 삼키고

열 손가락 뭉개지도록

땅거죽 파헤치고 흰 피 모조리 쏟아내고 마침내

깊고 깊은 적막의 심지 위에 눕고 싶어

곁을 떠나지 못하는 설움 몇 개와 함께 순장되고 싶어

누군가 부르는 소리 꿈속 같아서

눈뜨지 않아도 되는 암장이면 더 편안하겠어

 

---

*체 게바라.

 

 

 

낮술

 

 

1

큰애는 졸업식에 가지 않겠다며 낮술을 마셨다. 내내 자식 얼굴 쳐다보는 나에게 엄마 그냥 그만 식당에 가 엄마아이는 자꾸만 손을 내저었다. 좀 일찍 들어간다고 그새 주인이며 세상이 부드러워지겠느냐며 빈 잔을 가득 채웠다. “대학 졸업만으로도 엄마의 삶이 든든해지겠네아이의 손을 잡았다. 따뜻한 슬픔이 만져졌다.

 

2

아르바이트라도 하려면 중고차를 구해야 했다. 나는 아버지가 사는 안산安山에 올라 보험 대출해간 팔십만 원을 내놓고 그의 차를 끌고 내려왔다. 차는 얼마 전 세상을 떠난 할아버지처럼 곧 세상 밖으로 기어갈 태세였다. 왜 할아버지는 하필 안산에서 바스락거리며 마르는 걸까, 집으로 돌아와 엄마 보험 약관을 몰래 들여다보며 울었다. 차를 본 엄마는 속인 놈이 나쁜 놈이라며 혀를 찾다. 낮술에 진탕 취하고 싶었다.

 

3

일이 없어 며칠째 공치고 있었다. 병약한 여자 병원비가 밀려 있었다. 안산에 올라온 큰애에게 아직 쓸 만하다며 차를 내놓았다. 졸업 축하한다고 팔십에서 십만 원을 빼줬다. 굳어 있는 아이 손에 차 키를 건네고 돌아섰다. 제 엄마 안부 묻고 싶었지만 그냥 돌아섰다. 많던 재산 탕탕 깨먹고 나니 아주 뻔뻔해졌다는 소리 많이 듣고 살았다. 오늘은 비에 젖어 공친 날, 못 마시는 낮술이라도 마시고 싶은 날이었다.

 

 

 

나이

 

 

유영진은 다섯 해를 살고 있다

손가락 나이는 뗐으니

이제 제법 눈도 깊어졌다

할아버지 제상 앞에서 한참

골똘하더니 속 깊은 말을 꺼낸다

큰아버지 여섯 살 되려면

십년은 있어야지

지어미 바짓가랑이 잡고서야

말발 좀 서는 놈이 호방하게 십 년을 그리다니

, 어떻게 그 긴 세월

진득하게 붙잡고 있으려나

배꽃 같은 시간 얼마나 모아야

여섯 살이 될까

우리는 음복을 하고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사이

아이의 새근거리는 밤이 깊어간다

 

 

 

음 양

 

 

구월 십오일이나 육일 벌초해야지요

 

아니 팔월 초여드레나 이렛날 해야 돼

빨리 하면 그새 풀이 우북하드라

 

그럼 장은 언제 가실 건가요

한 일주일 전에 가셔야지요

 

그라제 고기 간하고 할라먼 한 장물 전에 가야제

그때 가야 고기도 싸고 물건도 많이 나고

 

아버지 제사가 추석 지나고 구월 이십육일이지요

 

구월 초하룻날이 지사다

명종이가 바쁘단디 올랑가 모르것다

느그 아부지 잘 안 보이등만 어젯밤 꿈에 뵈드라

항시 몸단속 잘하고 살아라

 

나는 일천구백육십삼 년 음력 유월 십육일 그녀의 몸에서

나와 울었다 처음으로

 

 

 

, 새가 난다

 

 

품에 안긴 아이가 운다

서럽게 울 수 있는 꿈을 꾸었는가

꿈이 밖으로 나오다니

너는 행복하겠다

나는 거미줄로 지은 집에 살았다

기억 속 그 집은 질기고 견고해서

울음소리조차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방문을 열면 꽃이 지고

방문을 열면 눈이 내리고

방문을 열면 누군가 먼 길을 떠났다

어느 날 비문을 먼저 익힌 아이가

허공을 가리키며 새, 새가 난다고 했다

 

때론 찰나가 한 생애를 잡아 이끈다

백야白也의 들을 건너와

비로소 늙어버린 시인은

작은 가슴에 질기고 질긴

거미집 한 채 지어

오랫동안 어린 자식의 죽음을

칭칭 동여맸는데

내송 반송 외송리를 넘어

금자리에서 집이 되지 못한 소나무를 본다

해남 가는 길

꿈 밖으로 나온 새 한 마리

서쪽 하늘에 서럽게 지워진다

 

 

       *유종 시집 푸른 독을 품는 시간(도서출판b, 2022)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