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계간 '제주작가' 2022년 겨울호의 시(5)

김창집 2023. 1. 29. 00:33

 

 

가슴이 뻐근하다는 말 - 현택훈

 

 

새 시집을 읽었는데

좋고 슬프고 좋고 아프고 하다 보니 뻐근하다고

제이가 말했다

 

새 인간을 사 왔던 시인인데

이번엔 어딘가로 스미는데

 

모든 책을 비닐 커버로 씌우면 좋겠어

사기 전에 읽지 못하게 말이지

 

서귀포를 자동 번역하면

텅스텐이 될 것 같아

 

그것은 탁구의 뒷면 같은 것

하늘의 이면에서 나타났다 사라지는

우주선 같은 것

 

슬프고 좋고 아프고 좋고 슬프고

아프고 좋고 슬프고 좋고 아프고

 

좋고 아프고 좋고 슬프고

약국에서 약을 사고

 

대체 휴일에 바닷가에서 한참을

왜가리처럼 바닷물을 바라보는 말

 

 

 

 

해안을 걸어요 - 황문희

 

 

엄마와 걸었던 길

내가 기억하는 용머리 해안은

켜켜이 쌓인 지층이 바다 위를 넓게 덮고 있었지요

너무 멀리 가지 말아라, 바다는 움직인단다

 

꼬리가 묶였던 용이 섬에서 풀려나자

바닷물이 넘쳐 솟구칩니다

잃을세라, 나는 딸의 손을 꼭 붙듭니다

엄마, 엄마, 여기 발 디딜 데가 없어요

옆구리에 딱 붙거라, 우리가 우리를 덮친단다

엄마와 걸었던 그 다리가 깊이 가라앉아

나아갈 길과 돌아갈 길 모두

바닷속 다리가 되고

 

그 옛날 호종단이 지맥 혈을 끊어

산도 바다도 오래오래 울었다는데

요동치는 용의 피가 딸의 발밑으로 스며듭니다

딸의 아래에서 또 다른 달이 소리칩니다

용이 왜 저리 깊이 헤엄치죠? 바다 아래는 무섭잖아요

우리는 땅 위에서 헤엄쳐야 해, 더 높이

저기 봐, 그 옛날 호종단이 아직 살아있어

내리치고 또 내리치잖아

어떤 해안은 바다 아래로 숨어 들어가고

어떤 해안은 자꾸만 뒤걸음질 치잖아

지도에서 사라지는 혈들

엄마와 딸들은 발 디딜 데를 찾아

오로고 올라도 더 오를 데가 없어

오래오래 파도처럼 울며 죽은 피를 철썩이고 있더라고

 

태초의 모래를 뱉으며 용이 머리를 흔듭니다

조금 더 깊이 자맥질하면서

 

 

 

 

물방울 여자 - 김연미

 

 

허공에 빗금을 치듯 하루 종일 비가 왔다

 

만약에

만약에 하는

수만 갈래 길 다 지우고

 

영정 속 미소 앞에서 물방울로 앉았다

 

막막한 뒷머리가 아래로 기울었다

 

그녀의 떨림은 눈물보다 조심스러워

 

투명한 눈금을 넘고도 끝내 울지 못했다

 

 

 

 

쿰다 1 김영숙

 

 

우리 동네 산물 이름 불러 보고 싶어요

 

산이물에 영등물 넓빌레물 골창물

 

쿰었던 사십 년 정을 아낌없이 내주는 이

 

 

퐁퐁퐁 솟은 물엔 주술이 걸려 있어

 

산도록이 마시고 나면 아이고, 살아지키여

 

할머니 부채바람 같은, 잘 익은 차 맛 같은

 

 

 

 

해가 지는 방식 - 김영란

 

 

  종달리에 수국 피면 섬에도 여름이 와요

 

  장마가 오기 전에 제발 한 번 다녀가라 퉁퉁 부은 눈으로 부러 웃음 짓다가 철 지난 사랑 앞에 무슨 말을 더 할까 밤사이 끙끙 앓다 충혈된 달 한 조각. 그 섬의 끝자락 그 오름에 매달린 말 종달종달 봄의 기억 종알종알 흐를 것 같은 한 번도 사랑에 울어본 적 없을까 마지막이라는 그 말은 그리도 쉬웠을까 갓 지난 여름이 다시 오지 않아도 수국은 피어나고 파도는 다녀간다 꽃잎에 숨어서 당신을 기다린다고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변하던 너, 마음을 알 수 없는 시간 저 너머에

 

  종달리 수평선 가득 수국꽃이 피었지요

 

 

         *제주작가회의 간 제주작가2022년 겨울호(통권 79)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