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유종 시집 '푸른 독을 품는 시간'의 시(5)

김창집 2023. 2. 10. 00:20

 

 

안녕

 

 

안녕이란 말 어디서 왔을까

소란스런 거리에 서서

안녕하고 나지막이 읊조리면

꽃잎이 지고 하루가 저물어 가네

얼마나 많은 별리들이 사람들 앞에 있었을까

바람 속을 떠돌고 강물에 섞여 흘러갔을까

안녕하고 뒤돌아서면

적막에 묻힌 집 한 채

떠오르고

잊혔던 이름들 둥불처럼 내걸리네

안녕이라는 말 어디로 갈까

허공에 매달려 반짝이는

이름들아

불멸의 노래들아

 

 

 

신호등

 

 

어차피 우주는 암흑이잖아요

누군가

딸깍 스위치를 올리자 어둠 속에서

별들이 빛을 내기 시작했지요.

운 좋게 우리는 반딧불처럼 땅 위에서

깜박이고 있지만

 

그대들도

어느 때 어느 날짜 함께 뒤엉켜 좋지 않았나요

 

붉고 푸른 신호등을 따라 건너는 이여 노하지 마세요

잠깐 페달을 놓쳤어요

문득 딸깍 스위치가 내려가면

우리는 꺼지는 별처럼 소멸될 거에요

 

 

 

사랑을 잃었다면

 

 

여우가 북항에서 사랑을 잃었다네

 

훌쩍이는 꽃에게

 

물에 뿌려진 은하수에게

 

여대생 목에 걸린 별들에게

 

시내전화 삼 번 누르고

 

이칠구에 이육삼삼

 

아니면 영팔이에 육육삼삼

 

 

 

흰 꽃을 엿보다

 

 

하얗게 여인들이 단장한 여인들이

한 날 한 낮을 걸어

꽃단장한 여인들이 나란히 산속으로 걸어 들었습니다

승주 어느 산자락 지리산 자락

하얗게 꾸민 여인네들이 한 날 한 낮을 걸어

아직 산속에서 나오지 못한 남정네들 만나러 가는 길

 

우련하게 푸른 날을 찢는

총소리에

그대 꿈 깨어

애타게 한 곳을 바라보았을까

 

하얗게 꽃단장한 여인들이

곰삭은 슬픔 머리에 이고

얼굴에 흐르는 땀 손으로 훔쳐내며

사내들 만나러 가는 길

 

우연히 엿보았습니다

 

 

 

피젖

 

 

그가 시인과 전사의 삶을 함께 살아낼 때

유신체제 전복을 선도 조종한 혐의보다

사랑의 무기가 두려웠던 당국은

세상 밖으로 그를 밀어내고 쇠빗장을 걸었다

세상 밖에서 시인으로 남은 반쪽의 삶을 버텨야 했을 때

그는 절대 고독의 둑샘에서 건져 올린 말들을

갈고 갈아 제 몸에 새겼다

전사의 언어 피의 언어로 무장하고

세상 안으로 침투했다 결사적으로

우윳갑에 흐르는 젖

시인을 반만이라도 닮고 싶은 속세의

사내가 피젖을 빤다

깡마른 전사의 알몸을 타고 흐르는

저 진한 피젖을

 

 

            *유종 시집 푸른 독을 품는 시간(도서출판 b, 2022)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