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
안녕이란 말 어디서 왔을까
소란스런 거리에 서서
“안녕”하고 나지막이 읊조리면
꽃잎이 지고 하루가 저물어 가네
얼마나 많은 별리들이 사람들 앞에 있었을까
바람 속을 떠돌고 강물에 섞여 흘러갔을까
“안녕”하고 뒤돌아서면
적막에 묻힌 집 한 채
떠오르고
잊혔던 이름들 둥불처럼 내걸리네
안녕이라는 말 어디로 갈까
허공에 매달려 반짝이는
이름들아
불멸의 노래들아
♧ 신호등
어차피 우주는 암흑이잖아요
누군가
딸깍 스위치를 올리자 어둠 속에서
별들이 빛을 내기 시작했지요.
운 좋게 우리는 반딧불처럼 땅 위에서
깜박이고 있지만
그대들도
어느 때 어느 날짜 함께 뒤엉켜 좋지 않았나요
붉고 푸른 신호등을 따라 건너는 이여 노하지 마세요
잠깐 페달을 놓쳤어요
문득 딸깍 스위치가 내려가면
우리는 꺼지는 별처럼 소멸될 거에요
♧ 사랑을 잃었다면
여우가 북항에서 사랑을 잃었다네
훌쩍이는 꽃에게
물에 뿌려진 은하수에게
여대생 목에 걸린 별들에게
시내전화 삼 번 누르고
이칠구에 이육삼삼
아니면 영팔이에 육육삼삼
♧ 흰 꽃을 엿보다
하얗게 여인들이 단장한 여인들이
한 날 한 낮을 걸어
꽃단장한 여인들이 나란히 산속으로 걸어 들었습니다
승주 어느 산자락 지리산 자락
하얗게 꾸민 여인네들이 한 날 한 낮을 걸어
아직 산속에서 나오지 못한 남정네들 만나러 가는 길
우련하게 푸른 날을 찢는
총소리에
그대 꿈 깨어
애타게 한 곳을 바라보았을까
하얗게 꽃단장한 여인들이
곰삭은 슬픔 머리에 이고
얼굴에 흐르는 땀 손으로 훔쳐내며
사내들 만나러 가는 길
우연히 엿보았습니다
♧ 피젖
그가 시인과 전사의 삶을 함께 살아낼 때
유신체제 전복을 선도 조종한 혐의보다
사랑의 무기가 두려웠던 당국은
세상 밖으로 그를 밀어내고 쇠빗장을 걸었다
세상 밖에서 시인으로 남은 반쪽의 삶을 버텨야 했을 때
그는 절대 고독의 둑샘에서 건져 올린 말들을
갈고 갈아 제 몸에 새겼다
전사의 언어 피의 언어로 무장하고
세상 안으로 침투했다 결사적으로
우윳갑에 흐르는 젖
시인을 반만이라도 닮고 싶은 속세의
사내가 피젖을 빤다
깡마른 전사의 알몸을 타고 흐르는
저 진한 피젖을
*유종 시집 『푸른 독을 품는 시간』 (도서출판 b, 2022)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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