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석곡 – 김원정
칠 년을 키운 석곡이 꽃을 피웠다
내일은 버리자 내일은 꼭 버리자 하던
칠 년의 마음이 스르르 녹아내린다
따지자면 게으름과 건망증이 칠 년을 버티게 해 주었다
시들시들 말라야 인심 쓰듯 콸콸 주었던 물
덥거나 춥거나 붙박이로 자리했던 그곳에서
칠 년 만에 꽃을 피웠다
오롯이 견뎌 꽃을 피우려고 얼만큼이나 안간힘을 썼을까
목이 메게 미안하다
흔들리는 석곡 향에 간사해지는 마음 들킨 것 같아
얼굴이 후끈 달아오른다
♧ 약발 – 홍기표
남자의 기를
한방에 뚝 꺾어버리는 요즘 여자들
그래서
남자의 자존심은
늘 바지 속에 숨어 산다
찝쩍대는 여자 앞에서
때론 불뚝 성질로 승리의 깃발을
세운 적도 있었지만
기센 여자들 앞에만 서면 고개 숙이는
요즘 남자들
그래도 한 가닥 남은 비책
은밀하게 숨겨둔 비상용
거시기 그 약발
♧ 냉이꽃 – 신동영
쪽파밭 한 귀퉁이
월세로 방을 얻고
뿌리까지 아린 바람
용케도 버텨내어
질기고 마른 듯 엎뎌
키를 키운 하얀 꽃
비록 밭 한 뙈기 없이
포개어 발을 뻗고
변할 건 하나 없는
그럴수록 짙어진 기질
몇 달을 풀로 머물다
꽃이라오 오늘은
♧ 운명의 노래 – 김용덕
잃어버렸다는 기억의 조각은 발자국
소리에 묻혀 어디론가 사라져
윤회의 허공을 만들고 억겁에
불화살은 만생의 영혼 속에
박혀서 다른 세계로 불사른다
기억조차 희미하게 땅속으로 묻히며
절망과 희망의 두 봉우리 손바닥으로
물길을 가르며 믿고 믿음은
험준한 갈무리에 막혀서 헤매며
늙은 날갯짓 노을로 날아든다
텅 빈 가슴골 휘젓고 소리 없는 메아리
바람이 되어 한바탕 큰 회오리가
춤을 추며 형상 없는 새김을 되새기고
시공을 초월하여 정자와 난자의 업을 업고
머무를 바 없이 하나로 돌아나간다
가위바위보 삼박자가 삶의 갈림길을 만들지만
거울은 또 자신이 보이는 모습 그대로 서 있다
♧ 풍경소리 – 유정민
깊은 골 고즈넉한 산사
처마 끝에 달린 풍경
스쳐가는 바람결에
흔들리며 우는 소리
속세를 지우지 못한
가슴 아픈 울음인가?
♧ 잠수병 – 진해자
수많은 날을 바다와 살았다
시름에 깎여 구멍 숭숭한 바위처럼
바람 들어 삭아버린 어머니의 세월
참고 참은 설음 저승문턱에서
숨비소리로 토해낼 때
닳아버린 손마디 관절로 남는다
밤새 한숨 푹 자고 뒤척이는 건
문드러진 관절염이 아니라
어쩌면
물질을 놓지 못하는
잠수의 마음이리
*한수풀문학회 간 『한수풀문학』 2022 통권17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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