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유종 시집 '푸른 독을 품는 시간'의 시(6)

김창집 2023. 2. 16. 10:25

 

 

 

 

 

늙은 여자가 바람벽을 붙잡고

오래된 슬픔 새기는 중입니다

바람의 귀가 열릴 때까지

머리로 벽을 쿵쿵 두드리는 중입니다

달이 차오르면 자식들 눈동자가

우물처럼 깊어지던 때를

여섯 개의 눈 위에 흙 뿌리던 날을

 

나무 기둥에 살이 올랐던 날들과

휘청이며 밭고랑 세던 날들을

귓속에 부리는 중입니다

 

그녀는 밭 한가운데 허가받지 않은

집 한 채 짓고 살았습니다

하루 이틀 삶 세 내가며

때로는 내일을 미리 당겨 써가며

바람벽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해가 들었다 지고

달이 들었다 졌습니다

소쩍새 울음소리가

여러 날 부뚜막에 앉았다가

그녀의 어머니에게 쫓겨 가기도 했습니다

 

늙은 여자가 바람의 귀를 열고 있습니다

그동안 허가 받지 않은 슬픔이었더라도

용서하시라고

어느 날 곡진한 이별을 고할 때

꼭 한번 들리겠노라고

 

 

 

시칠리아의 암소*

 

 

사랑한다고 미안하다고 고백했지만

끝내 건너가지 못하는구나

그래서 눈감지 못한 아이들이

그대들의 마지막 이야기가 남아있는 거리

산 사람들의 도시를

요나의 눈으로

판관의 눈으로 보는구나

 

거리에 속 깊은 눈들이

지금 당신을 보고 말하는구나

맹골의 물길 거슬러 신발이 벗겨지고

손톱이 닳아빠지도록 싸웠던

무섭고 서러웠던 마지막 사투를

구명조끼 갑옷처럼 두르고

거짓과 음모와 배신 앞에서

움켜진 주먹으로 치 떨리던 입술로

증언하고 있구나

 

질곡의 사월 또 사월

뒤틀린 욕망 짊어지고

시칠리아의 암소에 갇힌 자들이

그대들의 이름 부르며 울부짖는

신음소리 가득한 휴일 한낮이여

 

우리는 평생 소처럼 울부짖으며

그렇게

통한의 한 세월 건너가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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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칠리아의 폭군 팔라리테(B.C. 565549)는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럽게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사형 도구를 아테네의 명장名匠 펠릴로에게 주문한다. 펠릴로는 동으로 만든 암소상을 만들어 바치지만 팔라리테는 펠릴로를 암소상에 가두고 불을 때라고 명령한다. 그날, 암소상에 갇혀 펠릴로가 부르짖은 비명소리는 마치 소의 울음소리와 같았다고 한다.

 

 

 

 시위 시위

 

 

당신들은 나를 보고 있죠

거리는 벌써 불타오르는 듯해요

여러 눈들이 도로를 질주해요

비등점에 오르기 전

도시를 겨우 빠져 나왔다는 판단은

계속 유보되고 있어요

물가에 지은 집은 수없이 저질러 온 오해의

결과가 아니길 바라지만

오늘 아침 나는 섬처럼 떠 있군요

질주하는 눈들이 나를 향하고 있어요

물에 비친 꽃을 봐야 하는데

그대들은 내 눈 속에서 꽃이 살해당했으면 하네요

한 생을 들여다보는 것이 허기가 아니길 바라요

깊게 응시하는 것이 맹렬한 적개심이 아니길 바라요

당신들이나 나는 소의 눈을 그리지 않았어요

그러니 소의 눈은 죄가 없어요

 

한 생이 피켓을 들고 침묵하고 있군요

두 눈으로 결사를 외치는 것이

필사의 몸부림이 아니길 바라지만

그렇다고 피켓 뒤에 숨어 즉생(則生)을 구걸하지 않아요

소들은 조례를 이해하지 못해요

그러니 변명하지 않아요

죄는 사람들이 짓는 것

그러니 소에게 이해는 구하지 마세요

 

아침부터 날이 쪄요

땀처럼 흘러내리는 의지가

허기진 적개심이 아니길 바라요

내 생을 오해하고 싶지 않지만

여러 날 시위를 당겼다가 놓기를 반복하며

내 눈을 조준하고 있어요

때론 물에 비친 꽃잎이 필사즉생의

과녁 같기도 해요 

 

 

 

 

전라도 여자

 

 

아파트 술집 이데올로그는

티브이에서 흐르는 옛 노래를

의무적으로 흥얼거리는 것이라고

김치에 밴 곰삭은 젓같이 갯물 비린내 같다고 수작 주고받다가

불판에 더 얹히는 막창 맛나게 씹고 또 씹다가

술집을 나설 때 여자는

축축한 눈으로 해남이 고향이라고 했지

잔잔한 경상도 억양, 한국말로

동초등학교 졸업했다고 했지

 

누이여

왜 그날 술집을 나설 때

문밖에 나와

우리 뒷모습을 오래 보고 있었는가

옛이야기처럼 늙은 누이여

 

 

 

나무는 나무

 

 

죽은 나무가 서 있다

불을 삼키고

물에 잠겨도

무릎 꿇지 않고 꿋꿋하게

 

어린 나무가

고양이처럼 나를 쳐다본다

바람에 흔들려야 하는 숙명처럼

흑백영화에 소환되는 풍경처럼

총구 앞에 가슴을 드러낸

소년 파르티잔처럼 당당하게

 

사람들이 나무의 시간을 벌목한다

시간을 장전한 저격수가 나이테를 조준하면

저장했던 눈물을 말리는 나무

장렬하고 눈물겨운

 

나무가 시간을 벗고 알몸으로 비를 맞고 있다

알몸을 찢고 부화한 저승새가

나뭇가지에 앉아 신들을 본다

무저갱無底坑에 갇힌 신들이

목관 속에 눕는다

 

 

           *유종 시집 푸른 독을 품는 시(도서출판 b, 2022)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