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월간 '우리詩' 2월호의 시(1)

김창집 2023. 2. 15. 02:17

 

 

을 차고 - 김영랑

 

 

내 가슴에 독을 찬지 오래다.

아직 아무도 해한 일 없는 새로 뽑은 독

벗은 그 무서운 독 그만 흩어버리라 한다.

 

나는 그 독이 선뜻 벗도 해할지 모른다 위협하고

독 안 차고 살아도 머지않아 너 나 마주 가버리면

억만 세대億萬世代가 그 뒤로 잠자코 흘러가고

나중에 땅덩이 모지라져 모래알이 될 것임을

허무한디!’ 독은 차서 무엇하느냐고?

 

! 내 세상에 태어났음을 원망 않고 보낸

어느 하루가 있었던가 허무한디!’ 허나

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 바야흐로 내 마음을 노리매

내 산 채 짐승의 밥이 되어 찢기우고 할퀴우라 내맡긴 신세임을

 

나는 독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

막음 날 내 외로운 혼건지기 위하여.

 

 

 

근황 4 장문석

 

 

  돋보기를 만지작거리다 책을 덮는다 노안 탓만은 아니다 이젠 읽는 것보다 써야 하는 나이, 시작 노트의 시 몇 편으로 명분을 삼는다

 

  중국 청춘 멜로를 즐긴다 자막도 있고 내용 또한 단순하니 볼륨을 줄여도 좋다 남녀 청춘배우들은 또 얼마나 상큼한가 아내가 눈 흘길 때만 슬쩍 바둑으로 돌린다

 

  변기에 바짝 다가선다 찔끔찔끔 오줌발이 짧아져서가 아니다 거울 속 나를 좀 더 가까이 들여다보기 위함이다 염색도 했겠다, 슬쩍 눈웃음도 쳐보는

 

  늦가을, 물들면 모든 게 추억이다 숲길 걸어 저기 조그마한 산 주막, 도토리묵에 막걸리 한 사발 마주한다 혹시…… 문 열릴 때마다 고개를 든다

 

 

 

자란紫蘭 - 나병춘

 

 

자란자란 자랑자랑

자랑스레 꽃대를 올린다

자랑자랑 자고 싶을 때 자고

깨고 싶을 때 깨련다

 

지는 것이 피는 것이고 피는 것이 지는 것

시인의 콧노래 흥얼흥얼 들리는 뒤란에

자란자란 자장가처럼 그윽하게 펴

자릉자릉 꿈나라를 저어가네

 

누가 들어도 좋고 듣지 않아도 무슨 대수랴

세란헌* 외로운 창에 으스름달이 비추면

나도 덩달아 갸웃 갸웃거리며

일찍 깨어난 헛기침 소릴 엿들으리라

소쩍이 소쩍소쩍 울어옐 적에

나도 덩달아

자릉자릉 자란자란

소리도 없이 피고 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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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란헌 : 홍해리 시인의 집. 洗蘭軒.

 

 

 

보름달 정성수

 

 

이웃집에 사는 계집아이가 내게 말했다

 

우리 집 뜰에서 보름달을 바라보면

달 속에서 술래잡기하는 토끼들이 부럽다고

 

그믐밤이 되어 그믐달을 타고 서쪽 나라로

서쪽 나라로 가는 토끼들은

왠지 슬프다고

내 손을 잡고 보름달처럼 말했다

 

아이야 계집아이야

때가 되면 오기 싫어도 오는 것이 봄이고

때가 되면 가기 싫어도 가는 것이 겨울이란다

 

계집아이는 밤하늘을 바라보고

나는 계집아이를 바라봤다

 

어디에도 보름달은 뜨지 않았다

 

 

 

춘설 - 정지용

 

 

문 열자 선뜻!

먼 산이 이마에 차라.

 

우수절 들어

바로 초하루 아침,

 

새삼스레 눈이 덮인 멧부리와

서늘옵고 빛난 이마받이 하다.

 

얼음 금 가고 바람 새로 따르거니

흰 옷고름 절로 향긔롭어라.

 

옹숭거리고 살아난 양이

아아 꿈같기에 설어라.

 

미나리 파릇한 새순 돋고

옴짓 아니긔던 고기 입이 오물거리는,

 

꽃 피기 전 철 아닌 눈에

핫옷 벗고 도로 칩고 싶어라.

 

 

                 * 월간 우리20232월호(통권416)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