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서안나 시집 '새를 심었습니다'의 시

김창집 2023. 2. 23. 01:00

 

 

시인의 말

 

 

무언가를 오랫동안 하다 보면 어떤 결기 같은 게 생긴다

시를 쓸 때 늘 초심을 지니리라

 

시는 익숙한 세계에 낯선 목소리의 진동을 선사하는 것

나의 시는 나와 부딪친 모든 사물의 피를 마시고 태어났다

 

 

20229

서안나

 

 

 

손톱의 서정

 

 

손톱은 내가 처음 버린 영혼

손톱은 영혼이

타원형이다

 

손톱은

죽어서 산다

끊임없이 나를 밀어낸다

 

손톱을 오래 들여다보면

나무뿌리가 뻗어 나오고

진흙으로 두 눈을 바른 아이가

더러운 귀를 씻고 있다

 

손톱을 깎으면

죽은 기차들이 나를 통과해 가고

늙은 쥐가 손톱을 먹고 있다

 

늘 바깥인

손톱의 밤은

얼마나 캄캄한가

사랑은 개연성 따위는 필요 없다

 

멀리 날아간 손톱은

가끔 얼굴이 되기도 한다

 

 

 

 

분홍의 서사

 

 

분홍 속엔 분홍이 없다

 

흰색이 멀리 뻗은 손과

빨강이 내민 지친 손

 

나와 당신이

정원에서

늙은 정원사처럼

차츰 눈이 어두워지는

 

사라지는 우리는

 

분홍

 

 

 

 

진폐(塵肺)

 

 

침이 달았다

바람이 불면 욕하고 싶었다

 

거울을 들여다보면 내가 지옥이다

창문을 열면 검은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일찍 떠난 사람들은 읽을 수 없는 편지를 보내왔다

 

아버지가 내 이마를 만지면

내 꿈도 얼룩졌다

내가 볼 수 있는 슬픔만을 보리라

검은 손톱은 일종의 페허였다

 

아이들이 썩은 이를 지붕 위에 던지면

썩은 이가 돋았다

기차가 들어서면 흑해의 소금 냄새가 났다

뒤를 돌아보면 갱도에 핀 꽃들이 썩고 있었다

창문을 닫아도 아버지는 이미 더러워져 있었다

산 사람 속에서 죽음을 끌어내고 있었다

 

교실 C관에서 수음하던 날

꿈속에서 죽은 여자가 내게 말했다

네 속의 빛나는 너를 보여다오

실 뭉치 같은 여자가

꿈 밖으로 따라왔다 흑해 냄새가 났다

 

이 세계를 한 방에 쓰러뜨릴 수 있는가

모든 것은 각도의 문제였다

기침을 하면 검은 꽃이 쏟아졌다

 

 

 

 

새를 심었습니다

 

 

  새를 받았지요 택배로. 뿌리에 흙이 묻어 있었어요.

 

  은행과 김밥천국과 데빌 피시방을 지나 도착한 새입니다.

  새가 아니라고 말해도 새입니다.

 

  설명서를 읽었죠.

  새, 이것은 명사, 유목형입니다.

  잘 깨지는 것, 씨앗이 단단한 것, 비정규직 냄새가 나는 것,

 

  갓 배달된 1년생 새를 심었어요. 무채색의 새는 어둡습니다. 검은 것들은 어둠을 치는 기분입니다. 새는 나쁜 계절 쪽으로 한 뼘씩 자라고, 종이 인형처럼 잘 찢어집니다. 고독한 비행의 예감 같은 것이 따라왔습니다.

 

  새를 심었지요. 오렌지 맛이 나는 새를요. 새는 시들다 화들짝 살아납니다. 새를 오래 들여다보면 새싹 같은 을 닮았습니다.

 

  일주일에 물을 두 번 주었지요. 새의 눈동자가 조금 썩었어요. 얼굴을 매일 떨어뜨립니다. 새의 그늘이 깊어집니다. 실직의 징조입니다.

 

  새를 두드리면 상자와 고양이와 단추와 감정노동자가 있습니다.

 

  나는 살아야겠다라고, 자기소개서의 내용을 수정합니다.

 

  乙은 당신을 지우고 내가 사는 저녁의 영광입니다. 동맹과 배반의 테이블에서 태어납니다. 내일은 새의 날개가 펼쳐지는 개화기입니다.

 

  빨리 죽은 것들은 오래 삽니다. 유목의 계절입니다.

 

 

 

                   *서안나 시집 새를 심었습니다(, 여우난골, 2022)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