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장한라 시집 '철원이 그 시정마'의 시(3)

김창집 2023. 2. 26. 10:03

 

키사스 원칙

 

 

삼킨 것 너무 많아

말수가 줄어든 바다

 

주는 대로 받아먹는

바다 때문에 운다

 

조만간

파도로 남겠지

바다 덕분에 우는 나도

 

 

 

사람 구실 여자 구실

 

 

애도 못 낳으면서

할 말은 많나 보네

 

불임인 구실잣밤나무

맥없이 잎 떨군다

 

오롯이 매달렸다가

소스라쳐

 

 

 

까만 민들레

 

 

나는 까만 민들레

지붕 위에서 산다는 것은

돌아갈 수 없는 땅보다

절망의 바다보다 위안이라

나락의 끝닿은 곳

겨우 겨우 받은 꽃말,

 

빈곤과 내전의 아픔이 살점이 되어버린

푸른 혈맥은 얼룩진 회색 반점

마른 뿌리 깊게 내리지 못해

갈래갈래 꽃잎 흩어지고 찢겨져

차별의 세상에서 살아야 했고

끝끝내 살아 있어야만

 

타고 흐르는 별빛 한 줄기

낯선 진실은 드러나기나 할는지

어쩌다 까맣게 피었는지

어쩌다 난민으로 올라앉았는지

관심 어린 물음들도 궁극에는

찬란한 한계점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

 

곱게만 보지 않는 저들에게

가난하지도 불쌍하지도 않은 나는

지붕 위, 까만 민들레

이대로 당신의 이웃이 되고 싶은

 

 

 

추사의 궤적

 

 

송백을 스친 바람

차갑고 쓸쓸하다

 

고통의 시간은

살아내는 자의 몫이라고

 

마음 귀 아득하여도

흔들리지 않겠다

 

 

 

이어도 묵시록黙示錄

 

 

청정 물결 너머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는 자체로 신비롭다

 

무량 세월 씻긴 낮달이 바닷속 정낭을 비출 때

가슴 출렁이며 수문水門이 열린다

침묵의 바다에 띄우는 상군해녀들의 염원은

생명의 밀어들로 현주소를 불러내고

 

바다로 가는 길을 읊어주는

서귀포시 대정읍 가파리 이어도

이어도에 우뚝 선 종합해양과학기지

우레와 폭풍이 뒤엉켜 때론 격렬하게 휘몰아치곤

싹쓸이 할퀴며 삼키는 것들을 조명한다

 

파도가 살아 있어

이어도 키 높이로 살아 넘쳐

나무를 심어 섬을 자라게 하면 좋겠어

평화의 열매를 물고

독도의 온기를 품고서

일천 킬로미터 날아든 괭이갈매기

사철나무를 심겠어요 변함없이 신비로워

 

바다의 종족들에 햇살 내리며

세상 어디에도 없는 대한민국 최남단

풍랑을 밀어내고 물새알 품고

뿌리내린 사철나무 가지마다 활짝 핀

이어도 만세 만세 만만세

 

해경 경비함정 3006, 5002함 한바다로 맴돌다

수많은 섬들의 환호 속에 목청껏 외친다

섬이 일어선다 수문水門이 열린다

이어 이어 이어도가 울창하다

 

 

 

           *장한라 시집 철원이 그 시정마(도서출판 상상인, 202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