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우개 똥 – 남대희
연필로 ‘이별’이라고 쓰고
지우개로 문지르면 지우개도 아픈지
하얀 몸 까맣게 태우며
‘이별’을 돌돌 감고 쓰러지네
책상 위에 지우개 똥
거룩한 성자의 이름도
화려한 스타의 이름도
억만장자의 이름도 돌돌 말아 흩어져 있네
몸 문질러 지워낸 자리
하얗게 비워지네
내가 누군가의 허물을 돌돌 말아
지워내고 남은 지우개 똥이라도 좋겠네
♧ 한 번뿐인 지금을 - 성숙옥
창에 붙는 낙엽 같은 생각들이 어둠을 쓸어 온다
마음의 창을 두드리는 밤의 불빛
곁에 없는 얼굴들이 기억의 틈에서 나오고
속정을 주고받던 일이
보고픔 되어 빈 하늘가에서 한 올 한 올
눈송이처럼 날아온다
떠날 줄 모르는 그리움은 가슴에 오래 두지는 말자
봄이 가면 여름 오듯 오가는 것이 세상
풍성한 그늘을 나누고 떠나며 이룬 것에 집착 없는 나뭇잎을 보라
지금 이 순간도 싹 나고 꽃피고 낙엽 되는 것들
모든 걸 덮어 순백으로 빛나는 눈처럼
외로움이 바스락거리는 날은 강물 소리로 흘러가자
잘 지킬 수 없는 다짐들은 내려놓고
한 번뿐인 지금을 깊이 지니며
♧ 공空 또는 허虛 - 김혜천
캔버스에 흩뿌려지는 물방울
빛이 반사되자
미세한 틈으로 흘러내리는 액체
맺힘이 녹아내리는 시공간이다
수많은 타자들의 아우성
고갈 없이 터져 나오는 물음
현상이 끝난 자리마다 공이 열린다
투명 너머로 보이는 오브제
배경에 따라 달라지는 선명한 액체
명징하려면
속과 곁 그 아득히 먼 관계를 바로 볼 수 있어야 한다
♧ 밤에게 - 황현중
밤이여, 깊어 가게
산허리에 어둠 질끈 동여매고
산 그림자 두엇 아랫동네로 데려가
토방 위에 흩어진 신발
확독 속 빗물로 고인 가난 쓰다듬고
신열 앓는 낮은 이마들 짚어 주게
그리고 저 하늘의 고운
별빛 한 점만 머리맡에 놓아두게
저마다의 베갯잇에 고이는 눈물길,
젖은 꿈의 은하를 따라
고된 상처는 이제 흘러 사라지고
그때 너와 내가 만난 우리의 별자리는
신화처럼 서로의 기적이 될 테니
온몸 가득히 어둠이면서
다시 밝아지기 위해
온통 저를 불사르는 신화의 나라
기적의 밤이여,
그렇게 깊이 깊어 가게
♧ 도난 – 김정옥
폭설이 내린다던
일기예보도 빗나갔다
고속도로는 아니었지만
고개를 넘을 때 숨이 차진 않았다
사람들이
불 켜요
불 켜요
소리를 질렀다
그에게 그녀가 부르는 노래만 들렸다
그녀에게 도굴되는지 모른 채
이카로스 날개를 갖게 된다
♧ 무성해지는 일은 – 허향숙
근심하지 않는 곳에
근심 무성해지고
그리워하지 않는 곳에
그리움 무성해진다
산골짜기는
토끼를 잃어버려
토끼풀로 무성해졌다
나는
너를 잃어버려
너로 무성해졌다
茂盛해지는 일은
하지 않는 것에서 비롯된다
잃어버린 것에서 비롯된다
無盛에서 비롯된다
* 월간 『우리詩』2월호, 통권 416호(사단법인 우리詩진흥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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