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장한라 시집 '철원이, 그 시정마'의 시(2)

김창집 2023. 2. 22. 02:48

 

 

징조

 

 

당신의 하늘로

목 길게 뻗는다

윗입술 펄럭이며

누런 말 누런 이 드러내며 후레멘

 

한 뼘 땅도 없으면서

대지주 이름으로

기분 좋은 씨수말 후레멘

 

번식의 계절 달콤한 약속처럼

 

쌍태 노루 뛰노는 벌판

가슴 하나씩 맞바꾼 사이

강렬한 불빛 후레멘

 

 

 

철원이, 그 시정마

 

 

혈통과 족보가 없는 태생적 원죄로

쾌감 본능의 질주란

애초에 내 것이 아닌 것

 

제왕帝王을 위한 정조대 차고

불방망이처럼 달아올라도

수십 번 수백 번

눈부신 신부의 탱탱한 허벅지

헛물켜는 애무와 흥분만이

혀는 말려들고 꽃불 피어나는데

 

지어 놓은 경희궁

발 들여놓지 못한 광해군처럼

비운의 꼬리표 달고

절정의 순간 쫓겨나

죽일 놈의 운명이라 날뛰어 보지만

 

그녀 발길질에 떨어지더라도

열에 한 번쯤은

계절이 휘어지도록 합방하고픈

애액愛液 흥건한 꿈속

 

상처가 아문 자리 철원이,

누가 나를 부르면

위로가 닿은 부르튼 나날들 저며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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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원이 : 수컷이며 한라마(경주마 서러브레드와 제주조랑말 사이에서 탄생한 ).

* 시정마 : 교미交尾 바람잡이 말. 발정기가 되면 거칠어지는 암말로부터 씨수말을 보호하기 위한 애무 전용마.

 

 

 

말을 다독이다

 

 

순백의 하얀 말등

검은 선 덧입혀 얼룩말을 그린다

완만한 오름에 꼬리를 내려놓은 말

새별에 당신의 말을 풀어놓고

서로에게 말을 건다

그도 나도 말이 없다

검은 선들 사이 얼룩말 한 마리

 

말들이 달리지 않는다

 

가장 솔직한 감정을 지웠군

말로 말하지 못하는, 무심한 표정

작고 하얀 말의 소리 없는 외침

무슨 말인지 다시 말해 줄 수 있나요

위로되지 않는 말들이 말을 풀어낸다

공간을 통해 몸짓으로

삶의 일상과 말의 무게를 지탱할 또 다른 말이 필요해

 

끝없는 초원

떨어져 있는 것도 괜찮을

말들이 달아난 곳에

초록 짙은 말들이 연을 맺는다

 

 

 

말발도리*

 

 

묵묵한 발굽을 내려다본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나름 잘한다는 장제사는 어디로 갔나

뒤집어 박은 편자를 알기는 할까

 

박차가 옆구리를 찌른다

구보 사인에 불편한 편자

몸을 타고 하늘로 솟구치는

서로를 업고 있는 불안한 기승

 

당근을 나눠주던 손이 멈칫,

지나친다 참 좋은 말이었는데

성질이 나빠졌어

 

고르지 않은 발굽과

성질이 나빠진 것

좋았던 시절이 돌고 도는 사이

당근을 얻어먹지 못한 침이

불안해하는 발굽을 타고 흐른다

 

저기 나를 잘 안다는 사내

니퍼를 들고 절뚝거리며 오고 있다

통증이 육화育花될 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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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발도리 : 낙엽활엽관목. 열매가 말발굽의 편자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

 

 

 

동쪽의 말

 

 

태풍이

온다 해도

억세게 운 좋은 날

 

호시절 비껴가는

오천 년 구름 따라

 

서귀포

말발굽 소리

설레는 수마포구

 

 

             *장한라 시집 철원이, 그 시정마(도서출판 상상인, 202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