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래의 시간
이것은 몰락의 서두입니다
잠시 모래가 되겠습니다
모래 의자에 앉아 모래 모자를 쓰고 모래 연필로 모래의 시를 쓰겠습니다
모래를 움켜쥐면 나만 남습니다 아름다운 배반입니다 무너지는 유령입니다 부서져 시작됩니다
모래는 혼자 남는 노래입니다 모래를 만지면 부서진 마음이 따뜻합니다
지워도 남습니다
지워도 남는 것은 운명이라 생각하십시오 한 생이 아픕니다
당신이 무너져 모래가 되고 모래가 무너져 공터가 되는 이치입니다
지워지는 상심은 아름답습니다 모래는 나를 붙잡는 손입니다 전생에 가깝습니다 모래의 고요가 활활 타오르는 저녁입니다
모래 의자에 앉아 모래 가면을 쓰고 모래 수첩에 모래의 시를 적습니다
죽은 자들이 손을 내밉니다
모래가 다시 펼쳐집니다
♧ 보라에 대하여
주먹을 쥐면
어떤 다짐을 하게 된다
붙잡을 수 없는 결의만 남는다
주먹을 펴면
보라는 주먹을 펼친 색
본드를 부는 창백한 아이처럼
별이 빠져나간 젖은 얼굴에
불을 붙이는
슬플 때 당신은 당신에게 가장 가깝다
슬픔은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것이다
보라는
영혼이 스쳐 지나간 색
보라라고 쓰면
흐를 유자 같은 울음소리 들린다
어떤 영혼은 보라에서 펼쳐진다
보라는
깊은 저녁을 찢고 나오는
녹슨 눈
입술을 스스로 지우는
이교도의 피처럼
고요한
보라와 보라 사이
♧ 저녁의 양치식물
커다란 모자를 쓰고
양치식물을 심어볼까요
양치식물을 심는 저녁은 날카롭습니다
양치식물은 고생대부터 나를 따라온 식물
양치식물이 어둠을 뜯어먹습니다
당신의 조상도 만났을 겁니다
물을 주면 일각고래 무리가 몰려옵니다
당신의 영혼을 가둔 빙하도 떠오릅니다
오랫동안 식물을 바라보면
나는 인간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공벌레가 아픈 저녁을 숨깁니다
당신과 나는
검은 단도를 삼키고
긴 나이테를 걸어
머리 가슴 배를 함께 나누어 가진 사람
당신은 전생을 몇 번이나 다녀온 뱀고사리인가요
우리는 식물성 마아가린처럼
자꾸 미끄러집니다
나는 곤충처럼 머리 가슴 배로 나뉩니다
♧ 오늘의 사과
영혼에는 풀 한 포기 없으니
오늘의 사과는 흐리고 한때 비
나는 사과의 감정 속에 앉아 있다
세상의 모든 셔츠와 모자를 쓰고
사과를 열면
집안싸움처럼 비가 내린다
계단이 없고 비상구가 없고 우산이 없고
커튼이 있다
사과는 바깥을 자주 감춘다
화요일에는 가족들과 시든 사과를 먹었다
사과를 먹으면 친절한 혈통이 된다
사과는 감정에 가까워 새벽에 잘 깨어난다
새벽에 어머니가
사과처럼 앉아 있다
몰려나온 사과의 표정
손과 발이 없는 것들은 아름답구나
문장은
누군가를 용서할 때 붉어진다
용서하면 사과 맛이 났다
나는 나를
겨우 사랑하게 되었으므로
오늘의 사과는 흐리고 한때 비
♧ 소년들의 세계사
죽은 바다를 주웠다
우리들의 낙원에는 처음부터 뱀이 살았다
아비의 피에서 살과 뼈와 머리터럭을 꺼내었다
나는 찢겨진 밤의 아들
거짓처럼 태어난다
내 손은 죄의 빛깔
그대를 만지면 그대가 검어진다
색의 기원을 묻지 마라
고래처럼 질주했다
손목을 그으면 은단처럼 환해졌다
짧은 치마가 입고 싶었다, 어머니가 울었다
꽃무늬 팬티를 입고 돌아누우면
나의 여자가 종이꽃처럼 핀다
거짓말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이렇게는 살지 말자고 이를 닦으며 중얼거렸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싸워 울음이 된다
사람이 울면 실밥이 만져진다 피가 식지 않는다
나는 피가 흐르는 유령
한 손으로 덮을 수 없는 감정
아는가
나는 나를 안고 울다 가는 이름
나는 원래 없었다
나는 내가 어렵다
*서안나 시집 『새를 심었습니다』 (여우난골, 2022)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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