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춘설 - 정지용
문 열자 선뜻!
먼 산이 이마에 차라.
우수절 들어
바로 초하로 아침,
새삼스레 눈이 덮인 뫼뿌리와
서늘옵고 빛난 이마받이 하다.
얼음 금가고 바람 새로 따르거니
흰 옷고름 절로 향기롭워라.
웅숭거리고 살어난 양이
아아 꿈같기에 설어라.
미나리 파릇한 새순 돋고
옴짓 아니긔던 고기입이 오물거리는,
꽃 피기 전 철 아닌 눈에
핫옷 벗고 도로 칩고 싶어라.
♧ 현대산 통조림 love-777 - 김나비
오늘이 마지막 기회입니다
이 제품은, 3회차 만에 매진될 정도로 반응이 뜨거웠는데요, 이번에 재출시한 상품에는 웃음, 바다, 촛불 등 달달한 감미료를 첨가했습니다
사용 시 주의사항 알려드릴게요
첫째, 절단 부분이 날카로우므로 개봉 할 땐 심장이 베이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둘째, 유통 중 흠이 생겨도 절대 교환이 안 됩니다
셋째, 진심을 담는 일은 폐기 할 때 어려움을 겪을 수 있어, 가슴 언저리만 넣었습니다
넷째, 개봉 후 변질 될 우려가 농후하니 이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기타 마음 가공품이고 멸균제품은 아닙니다
유통기한은 제품 윗면 표기일까지이구요 이번에 주문하신 분 중 선착순 다섯 명에게 보너스로 이별 통조림 하나를 더 드립니다
헤어짐은 통통하게 살 오른 사랑으로 만들지요 love 통조림을 구매하신 분들이라면 반드시 먹어봐야 할 맛인데요 ?
자 지금 바로 전화주세요
영양 정보는 눈물 소금 400g 고통 탄수화물 600g
스트레스 콜레스테롤 65g 화난 단백질 12g입니다
마감이 5분, 5분 남았습니다
드디어 매진입니다
방송 후에는 080-6242-4545로 전화주세요 지금까지 love-777통조림이었고요, 저는 호스트 김나비였습니다
♧ 새벽의 처형장 - 김영랑
새벽의 처형장處刑場에는 서리 찬 마魔의 숨길이 휙휙 살을 에움니다
탕탕 탕탕탕 퍽퍽 쓰러집니다
모두가 씩씩한 맑은 눈을 가진 젊은이들 낳기 전에
임을 빼앗긴 태극기를 도루 찾아 삼 년을 휘두르며
바른 길을 앞서 걷던 젊은이들
탕탕탕 탕탕 자꾸 쓰러집니다
연유 모를 떼죽음 원통한 떼죽음
마지막 숨이 다 저질 때에도 못 잇는 것은
하현下弦 찬 달 아래 종고산鐘鼓山 머리 날으는 태극기
오 – 망亡해 가는 조국의 모습
눈이 차마 감겨졌을까요
보아요 저 흘러내리는 싸늘한 피의 줄기를
피를 흠뻑 마신 그해가 일곱 번 다시 뜨도록
비린내는 죽음의 거리를 휩쓸고 숨다젓나니
처형이 잠시 쉬는 그 새벽마다
피를 씻는 물차 눈물을 퍼부어도 퍼부어도
보아요 저 흘러내리는 생혈生血의 싸늘한 핏줄기를
♧ 웃음꽃 잔치 - 이화인
누가 볼까 봐
저녁 어스름에 희미한 별빛 꼬리 붙들고
살금살금 담장을 넘는다
청상과부 호박 댁이 소리 소문 없이
허우대 멀쩡한 보름달과 정분났다
환갑 진갑 다 지나 폐경도 오랜
황천길 문턱에서 무서리 맞은 몸으로
배배 꼬인 마른 넝쿨에
크고 작은 애호박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하하 호호 허벌난 웃음꽃 잔치에
부러운 호박꽃들이 축하잔치 벌였다.
♧ 빛을 기웃거리고 싶은 생각까지 - 성숙옥
서리가 내린 후
하룻밤 사이에 무너지는 것들을 본다
차가워지는 대기를 몸으로 맞는 계절
잎은 말리고 엎질러진 색은 흰 국화까지 스미고 만다
낙엽을 얹어 색으로 말하는 가을 들판
갈색으로 평정하며 소멸을 받든다
나는 내미는 빛을 덥석 잡은 그림자를 보며
색과 잎 사이 뜬구름의 일을 떨군다
안갯속에서 안개를 지우려는 내 감정은 어떻게 마모되어 갈까
아직 지켜야 할 것이 있는 듯 빈 가지를 가끔 흔드는 나무
자꾸만 모양을 바꾸는 내 마음마저 흔든다
사랑이 꽃으로 올 때 그 방향에서 쏟아지던 빛, 그리고 그림자
가시에 찔리다 그늘에 묶이다
오지 않은 시간을 놓아버린 환상의 민낯들
빛을 기웃거리고 싶은 생각까지
마르는 시래기 같아지는 지금
간다고 다시 못 올 사랑은 없겠지만
가고 오는 것들 사이
헤매는 마음을 분질러 넣고
타닥거리는 아궁이 불이나 멍하니 볼까나
* 월간 『우리詩』 2월호(통권 416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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