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의 소리 – 석연화
그대여
목소리를 낮추어 주십시오
속삭여 부르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습니다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재잘거리는 새들의 소리가 있습니다
마음을 열어 주십시오
뺨을 더듬는 바람소리가 있습니다
고개를 돌려 주십시오
수줍게 터뜨리는 꽃망울의 신임소리가 있습니다
그대여
시인의 마음이 되어 주십시오
이 기막힌 윤회의 소리가
당신을 찾아오고 있습니다
♧ 봄꽃의 첨병 – 성명순
뒤에 서 본 적이 없다
눈보라 온몸으로 헤치며
걸어온 언덕에 비로소 벙근 매화
나를 보고
모두 저마다 꿈을 보이라고
당당히 외친다
♧ 아주 짧은 소설처럼 – 손현숙
통유리 창가에 하품으로 앉아서 아슴아슴 햇살을 읽네 화장도 하지 않은, 매캐한 암향이 하늘 문을 연다 구름 속에 구덩이를 파고 푸른 질의 여자가 발목을 내린다
남쪽 끝에서 소식을 불러오는 바람의 허리 좀 봐,
치맛자락 펄럭이는 키 작은 여자, 방금 울다가 볼우물 패게 웃는 도서관 앞 능수매화, 반달 손톱 같은 심장을 달고 꽃망울 터뜨린다
♧ 1,000원 – 오형근
서울이 길 위에 쏟아놓은
토사물 같은,
앓는 짐승처럼 엎드려 있는
동냥하는, 젊은 여자의 두 손에
1,000원을 놓아 주었네
잔뜩 웅크린 것이 죄인 같았네
볼일 보고
되돌아가다가 보았네,
한 부인이
젊은 그녀의 두 손에 1,000원을 주면서
뭐라고 말하네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젊은 그녀를 탓하는 소리가 아니기를 바랄 뿐이네…
사람들이 젊은 그녀를
못 볼 것이라도 본 것처럼 잘도 피해서 가네
시간 지난 토사물처럼
서울 한복판에서 젊은 그녀가
점점 굳어져 가네
♧ 보리를 밟으며 – 이진옥
잔설을 이고 파랗게 웃는
밟지 않으면 턱없이 달뜰
남을 밟고 선다는 것이 못할 일이기는 하나
밟히고 긁힌 상처가 내면을 채울 때
비로소 푸르게 비상할 수 있다면
꼭꼭 밟아준다
발밑이 꿈틀
봄이 깨어난다
*계간 『산림문학』 2023년 봄호(통권49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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