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계간 '제주작가' 2023년 봄호의 시(2)

김창집 2023. 4. 30. 00:05

 

긴 무덤의 끝 김순남

 

 

겨를 없이 뱃길에 떠밀려

대전형무소 차가운 벽에 머물던

귀향의 꿈은 실핏줄마다 그물을 엮었다

 

짐짝처럼 트럭에 실려

여명을 덜컹거리며 곤룡재 넘을 때도

죽음이 죽음을 덮는 골짜기가 될 줄은 몰랐다

 

수로처럼 길게 파놓은 구덩이 앞에서

머리 박고 엎드려 살려달라는 말조차 잊었다

 

대전 동구 낭월동 13번지

뼈와 혼령이 산처럼 쌓인 골령골

세상의 가장 긴 무덤의 끝에서

비바람으로도 지워지지 않는 시간을 닦는다

 

죽음을 이겨낸 사월 바람이

밭갈이 때 나온 뼛조각을 비료포대 걷어내고

늙은 누이가 젊은 사진 품고 울었다

오빠! 오빠!

늙은 아들의 색 바랜 엽서를 움켜쥐고 울었다

아버지! 아버지!

부름과 부름이, 눈물과 눈물이 삽을 들고

긴 무덤의 끝을 씻는다.

 

 

 

봉근물 김순선

 

 

한수기곶 깊은 곳에

솟아나던 봉근물

언제나 찰랑거렸다네

 

무장대에게는 생명의 젖줄이었지

이 물을 봉갔을 때

이제 살았구나

비록 삼시 세끼 밥은 못 먹어도

갈증은 해소할 수 있었으니

나무 열매나 풀뿌리를 먹으면서도

한시름 놓았으리라

물로라도 배를 채울 수 있었으니

천하를 얻은 것보다 더 기뻤으리라

 

그것도 잠시 잠깐

토벌대들은

무장대를 소탕하기 위해

그들의 목을 조르기 위해

봉근물을 매립해 버렸다네

 

지금은 영영 마실 수 없는

상처만 남아 있네

눈물만 고여 있네

 

 

 

, - 김원욱

 

 

, 하늘 가까운 곳으로 빗소리가 내려앉습니다

 

겨우내 깊숙이 숨어 있던 붉은 동백 꽃잎도 숨죽인 채 내려앉습니다

 

초신성의 폭발인 듯

 

서녘을 뚫고 날아온 포성이 빗소리에 맺힙니다 툭, ,

 

까마득한 날 별나라 군주들이 폭죽놀이 같습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는 시원의 둔덕에 올라 고요한 연못을 바라봅니다

 

이때 누군가 툭, 돌멩이를 던집니다

 

영문도 모른 주검이 수면으로 떠오릅니다

 

거대한 소용돌이에 갇힌,

 

창 너머로 한 시대가 집니다

 

 

 

영혼의 별 김항신

 

 

튀르키예 밤하늘

쏟아지는 별들 위로

우주별 하나 보내고

여섯은 가네

 

내전만큼이나 할 말은

많아도 할 말을 잃게 하는

우주의 법칙

 

여자는 약하나

어머니는

위대하다는 말은

 

조물주는 를 키운다,

어머니의 강인력

 

 

 

당신을 구하는 문제 - 김혜연

 

 

  대괄호를 열면

  당신은 오래된 전축처럼

  먼지 아래 있다

  혼이 없는 당신도 당신이라면

 

  괄호 밖 당신이

  턴테이블에 레코드를 건다

  햇빛 아래 부유하는 먼지들

  가난에 어울리지 않는 선율은

  아름다운 폭설같다

 

  중괄호를 열고

  나는 나의 기억 순으로

  당신의 시간을 약분하고

  물구나무를 한 당신이

  당신을 나눈다

  재가 될 때까지

  부유할 때까지

 

  슬픔의 꼭대기에선 우는 법이 생각나지 않아요

  선택을 미루는 법을 몰라

  되감기로 웃고 말아요

 

  괄호를 열자 빈 당신이 펼쳐져 있다 당신이 떠나야 완성되는 당신의 푸가 당신만이 들을 수 없는 당신의 응답 슬프게도 먼지만이 당신 위에서 춤을 춘다 햇살 아래 죽음은 아무 일도 아니지 괄호를 닫는다 문제의 반대편에 나만 남는다.

 

 

                * 계간 제주작가2023년 봄호(통권 80)에서

                                    *사진 : 으름덩굴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