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긴 무덤의 끝 – 김순남
겨를 없이 뱃길에 떠밀려
대전형무소 차가운 벽에 머물던
귀향의 꿈은 실핏줄마다 그물을 엮었다
짐짝처럼 트럭에 실려
여명을 덜컹거리며 곤룡재 넘을 때도
죽음이 죽음을 덮는 골짜기가 될 줄은 몰랐다
수로처럼 길게 파놓은 구덩이 앞에서
머리 박고 엎드려 살려달라는 말조차 잊었다
대전 동구 낭월동 13번지
뼈와 혼령이 산처럼 쌓인 골령골
세상의 가장 긴 무덤의 끝에서
비바람으로도 지워지지 않는 시간을 닦는다
죽음을 이겨낸 사월 바람이
밭갈이 때 나온 뼛조각을 비료포대 걷어내고
늙은 누이가 젊은 사진 품고 울었다
오빠! 오빠!
늙은 아들의 색 바랜 엽서를 움켜쥐고 울었다
아버지! 아버지!
부름과 부름이, 눈물과 눈물이 삽을 들고
긴 무덤의 끝을 씻는다.
♧ 봉근물 – 김순선
한수기곶 깊은 곳에
솟아나던 봉근물
언제나 찰랑거렸다네
무장대에게는 생명의 젖줄이었지
이 물을 봉갔을 때
이제 살았구나
비록 삼시 세끼 밥은 못 먹어도
갈증은 해소할 수 있었으니
나무 열매나 풀뿌리를 먹으면서도
한시름 놓았으리라
물로라도 배를 채울 수 있었으니
천하를 얻은 것보다 더 기뻤으리라
그것도 잠시 잠깐
토벌대들은
무장대를 소탕하기 위해
그들의 목을 조르기 위해
봉근물을 매립해 버렸다네
지금은 영영 마실 수 없는
상처만 남아 있네
눈물만 고여 있네
♧ 툭, - 김원욱
툭, 하늘 가까운 곳으로 빗소리가 내려앉습니다
겨우내 깊숙이 숨어 있던 붉은 동백 꽃잎도 숨죽인 채 내려앉습니다
초신성의 폭발인 듯
서녘을 뚫고 날아온 포성이 빗소리에 맺힙니다 툭, 툭,
까마득한 날 별나라 군주들이 폭죽놀이 같습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는 시원의 둔덕에 올라 고요한 연못을 바라봅니다
이때 누군가 툭, 돌멩이를 던집니다
영문도 모른 주검이 수면으로 떠오릅니다
거대한 소용돌이에 갇힌,
창 너머로 한 시대가 집니다
♧ 영혼의 별 – 김항신
튀르키예 밤하늘
쏟아지는 별들 위로
우주별 하나 보내고
여섯은 가네
내전만큼이나 할 말은
많아도 할 말을 잃게 하는
우주의 법칙
여자는 약하나
어머니는
위대하다는 말은
조물주는 ‘나’를 키운다,는
어머니의 강인력
♧ 당신을 구하는 문제 - 김혜연
대괄호를 열면
당신은 오래된 전축처럼
먼지 아래 있다
혼이 없는 당신도 당신이라면
괄호 밖 당신이
턴테이블에 레코드를 건다
햇빛 아래 부유하는 먼지들
가난에 어울리지 않는 선율은
아름다운 폭설같다
중괄호를 열고
나는 나의 기억 순으로
당신의 시간을 약분하고
물구나무를 한 당신이
당신을 나눈다
재가 될 때까지
부유할 때까지
슬픔의 꼭대기에선 우는 법이 생각나지 않아요
선택을 미루는 법을 몰라
되감기로 웃고 말아요
괄호를 열자 빈 당신이 펼쳐져 있다 당신이 떠나야 완성되는 당신의 푸가 당신만이 들을 수 없는 당신의 응답 슬프게도 먼지만이 당신 위에서 춤을 춘다 햇살 아래 죽음은 아무 일도 아니지 괄호를 닫는다 문제의 반대편에 나만 남는다.
* 계간 『제주작가』 2023년 봄호(통권 80호)에서
*사진 : 으름덩굴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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