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계간 '제주작가' 2013년 봄호의 시(3)

김창집 2023. 5. 3. 09:49

 

 

심인(心因) 나기철

 

 

말은 잘 안하지만

아내는 늘 왼쪽 다리와

양어깨가 아프다 한다

오래 됐다 한다

 

나는 허리도 안 아프고

다리도 안 아프다

 

단지 귀 아래 근육만

좀 땡길 뿐이다

 

매일 아침

걸으러 가기 전

물을 마시고 가면

서서히 귀 아래가 좀 땡긴다

 

오늘은 안 마시고

갔는데

또 서서히 땡겼다

 

 

 

 

춘첩(春帖) 2 - 서안나

 

 

매화 가지에 꽃을 불러 아홉 가지 산나물에 찬술을 마신다

늙은 개는 하루를 굶기고 집안에서 칼질을 삼간다

붉은팥을 뒤로 던지면 매운 수선화가 피고 저수지는 뿌리가 깊어진다

 

편지를 쓰면 수심이 깊어 두 사람이 죽고 한 사람이 노래하고

매화는 아이들 여린 잇몸에 새 이로 돋아나고

 

입춘이라 쓰면 착하게 살고 싶다

매화는 시계방향으로 피고 볏짚을 태우면 정인은 매화 속에서 병이 들어

 

고서를 펼치면 화요일의 감정은 반듯하고

눈멀고 귀멀어 매화는 무겁더라

매화향기 가두어 차로 마시면

나이 삼십에는 꽃이 어렵고 사십에는 아픈 곳에서 물소리가 난다

 

커다란 돌덩이를 등에 이고 걸으면

서른 걸음마다 물결이 깊어지는데

이를 윤이월이라 부르면

풍경에도 사람냄새 깃들어 진흙 물고기가 몰려드네

 

 


 

장갑 양동림

 

 

건설하고

농사짓고

기계를 만지며

온갖 일을 다 하는 장갑은

보통은 한번 쓰고 나면

더럽다고 버려지지만

디자인을 뽐내고

색깔을 이야기하고

왼쪽 오른쪽 따지기나 하는

예쁜 장갑은

끼고 나서는

장롱 속에 고이 간직한다

 

소중한 손을 위하여

버려지는 장갑

예쁜 장갑을 지키려고

위선에 떠는 차가운 손

추운 날 슬퍼지는 삶들이 있다

 

 

 

 

 시안모루*를 걷는다 - 오광석

 

 

중산간 낮은 돌담으로 두른 공간

항쟁의 날들이 저문 후

시간 숲에 묻혀버린 작은 공화국

조릿대 속에 감춰진 전선

경계 서던 산사람들은

저무는 해를 보며

살아갈 날들을 헤아렸다

 

산사람 얼굴이 장대 위에

꼬질꼬질한 모양으로 걸린 날

어두운 침묵의 궤 속에

산사람들을 감춘 산 사람들

바다 건너온 사상의 파도가

아이들을 삼키려 할 때도

감싸 안고 쓸려가지 않았다

 

산사람들이 걸었던 숲을

산 사람들의 아이들이 걸어왔다

날카로운 나뭇가지들 사이

흐윽 울음소리가 들렸다

고목마다 박혀있는 눈들

흔적으로 살아남은 산사람들

 

돌아온 햇살이

숲을 비추는 정오 무렵

희미하게 반짝이는 녹슨 솥단지

항쟁은 끝나지 않았다

돌아온 산 사람들의 아이들에게

말을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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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 중턱 중산간 마을 사람들의 피난처, 이덕구 부대 주둔지.

 

 

 

 

책갈피 장이지

 

 

  매미 날개 멀리서 들리는 뇌성(雷聲) 잠자리 날개 붉어진 눈 부서지는 모든 것들 상승하거나 하강하는 하늘 잃어버린 편지 영원한 대상 희미하게 부유하는 체취 시시각각 다른 어종이 걸리는 빛의 그물 항상 다른 색으로 반짝이는 지느러미-날개-포말……

 

 

                                      *계간 제주작가2013년 봄호(통권 80)에서

                                                        *사진 : 반디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