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문영종 시집 '물의 법문'의 시(4)

김창집 2023. 6. 20. 00:35

 

 

가을 억새

 

 

억새의 날갯짓은 파도다

내 생의 바다에서 파도치는 영혼의 물결이다

그래도 억새는 억새고 나는 나다

억새는 바람에 서걱거리며

온몸으로 날아오르는 물새가 되기도 한다

그 소리가 하늘을 깨뜨리기도 한다

그런 억새 보러 억새 세상 나는 간다

 

저승에서 새였던 억새

이승에서 날개를 접어버린 새

 

온몸 뼈만 남게 바람에 말린다

빛을 보듬고 하늘에 머리를 조아린다

제주 가을 들녘은 억새들의 사원이다

 

 

 

 

바위 연꽃

 

 

부처손 옆에 얼굴 환하게 내민 자그만

바위연꽃 연화바위솔

세상 욕심 없어 만족하다는 듯 앙증스럽게 피어 있다

온몸이 불꽃덩이로 타오른다

깨달음을 얻어냈을까

이파리조차 하나하나 꽃잎이 된다

바닷가 바위틈에서나 꽃 피우던

바다 버리고 언제부터인가

제주수목원 온실에 나 앉아

오가는 중생에게 보리를 보여주고 있다

 

 

 

 

겨울 억새

 

 

비에 젖은 억새는 측은하다

꽃송이 바람에 다 날려버리고

머리카락 벗겨진 사내

우산도 없이 온몸으로 비를 맞고 있다

그 싱싱하던 푸르름도 다 잃어버렸다

그에게 남은 인생은

황혼의 바람 앞에 서 있는 일만 남았다

자식들이 푸르게 자랄 때까지

오래 지탱해야 할 목숨이다

 

 

 

 

찔레꽃

 

 

찔레꽃은 첫사랑 같은 빛바랜 사진 같은 꽃이다

별도오름 모퉁이에서 너를 다시 만났다

애기업은 바위 지나 푸른 수평선 마주 하고 있었던 너

무명색 수줍음이 묻은 얼굴로 다가와 물었다

행복하게 사시냐고

 

찔레꽃은 천형처럼 몸에 가시가 돋아 슬픈 꽃이다

어머니는 오십 평생 홀몸으로 찔레꽃만 피우셨다

이젠 요양원에서 남아 있는

여생에 빨간 열매 매달고 계신다

살가죽만 남고 뼈만 보여 슬프다

기억은 맑아 누가 다녀갔는지 안다

어머니는 뼈가 된 가시를

자식들 모르게 몸에 숨기고 살아 오셨다

 

 

 

 

물의 법문

    -한라산 금봉곡 석굴암에서

 

 

그 산사엔 물이 귀하다

골짜기를 건너온 물이 웅덩이에 고여 있을 뿐이다

부처님 공양물이란 팻말이 있다

물속엔 산새소리도 있고

흘러가는 구름도 있다

그날은 이른 봄날이었다

산행 길 곳곳에 아직도 생을 못 바꾼 눈더미가 있어

생각의 눈길을 끈다

세상에 오래 존재하는 것도 집착일까

바람이 저만치 달려가면서 잔가지를 흔든다

이것도 등산이라고 몸이 거칠어진다

산사에 들어서니 목부터 물을 찾는다

물이 가득한 웅덩이, 등골이 오싹하다

왠 백사 한 마리가 도를 닦으려고 부처님 공양 물속에(?)

자세히 보니 도롱뇽 알이다 속이 훤히 보인다

깨알같이 움직이는 눈동자들 있다

물웅덩이에서 부처님이 참 생명을 키우시고 있으시다

원효스님은 해골바가지 물로 한 소식을 접했다고

깨끗하다 더럽다 하는 것도 마음이 짓는 일이라고

물이 나를 유혹한다

나는 법문 하나 건지고

산사에서 구름처럼 떠돌다 내려왔다

 

 

 

             *문영종 시집 물의 법문(도서출판 각, 2010)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