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향토문화 기행

살아 숨쉬는 제주도의 자연과 역사

김창집 2002. 4. 25. 13:21
--- 남제주군 안덕면(安德面) 지역 답사기

▲ 왕이메, 숨어 있는 삼신인(三神人)의 기도처

천기누설을 겁낸 왕이메가 꼭꼭 숨어 있고 싶었을까? 작년 6월 안덕면 답사 때는 짙은 안개로 접근조차 허락지 않더니, 이번 답사 전날도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43명의 답사 신청을 받고 대형 버스 1대를 빌려 놓았는데, 전날 밤은 물론 이른 새벽까지 진행 여부를 묻는 전화가 쏟아진다. 일요일에 치르는 행사라서 순연(順延)이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라, 무조건 강행한다고 일러놓고는 날이 개기만을 기다렸다. 만약 가 보고 질퍽거려 숲으로 들어갈 수 없다면, 잔디로 되어 있는 서영아리오름으로 대체하리라 내심으로 결정해 놓은 채.

출발 1시간 전이 되어서야 비가 완전히 멎고 우리가 갈 방향의 하늘이 열리기 시작한다. 9시까지 모인 사람은 36명, 대부분이 나의 올드 팬들이었다. 50대부터 70대까지가 주를 이루는 고마운 어른들은 나의 안내를 좋아한다. 교수님들은 자신들의 수준은 생각 않고 너무 자기 위주로 설명하기 때문에 알아듣기 어려운 반면, 전공은 안했지만 경험에서 우러나온 나의 쉬운 설명이 좋다는 것이다. 그 이면에는 나를 따르면, 오름에 오를 수 있다는 점 외에 전설이라든가, 나무와 풀꽃 등 유적 이외의 조그만 지식이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이젠 답사도 다양화 되었다고나 할까?

왕이메 입구에 도착했을 때, 날은 활짝 개어 집념에 찬 나를 받아들였다. 나는 산에서 제일 필요한 ‘자연에 대한 외경(畏敬)’을 부탁한 후, 9기 회장에게 뒤쪽을 맡기고 앞장서 풀에 남아 있는 이슬을 털어내며 미로 같은 숲길에 접어들었다. 숲에서 나오는 맑은 공기가 일행의 기분을 끌어올리고 보리수나무에 가득 달린 꽃들이 분위기를 띄운다. 왕이메는 신성한 오름답게 그 입구를 꼭꼭 숨기고 바로 들어오는 것을 용납지 않았다. 남제주군 안덕면 광평리 산79번지의 표고 612.4m, 비고 92m, 둘레 3,665m 되는 오름의 실체는 진입로에서는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것이다.

20여 분 걸었을까? 우리는 벌써 능선에 서 있었다. 앞에 펼쳐진 분화구의 웅장한 자태를 보며, 뒤에 오는 할아버지가 나이를 잊고 탄성을 지른다. 거의 산굼부리 분화구에 필적하는 깊이와 높이를 지녔고, 안에서 바라보는 경치는 그곳을 훨씬 능가한다. 안온하게 둘러싸여 숲이 무성한 이곳은 겨울이면 노루들이 안식처가 된다. 10여분 걸어 평평한 분화구 가운데 섰을 때, 우리 제주도에 이런 곳이 남아 있음에 모두들 감사하며 펼쳐진 광경에 입을 다물 줄 모른다. 연륜으로 보나 해온 일로 보나 제주도에 대해서 많이 안다고 자부하는 분들인데, 오름 모임의 김 선생을 제외하고는 모두 처음 와 보는 곳이란다.

▲ 무섭도록 철저한 자연의 질서

2~3일전 추위로 고사리들이 솟았다가 모두 얼어버렸다. 은근히 기대했던 아줌마들이 그 크기를 보며 탄식이 이어지고, 안쪽으로 갔던 분들은 달래를 캔다고 야단이다. 버스 기사 아저씨도 알아두어야 하겠다고 차문을 닫고 쫓아와 있다. 옛날 탐라국 고량부 삼신왕이 이곳에 와서 사흘 동안 기도를 드렸다고 하여 이름을 왕이메라 했다는데, 무엇을 빌었을까? 아무래도 탐라국의 번성과 후손의 안녕을 기원하지 않았을까. 오름에 대해서는 얘기를 생략하고, 서쪽 사면으로 올라 삼림욕을 하면서 동쪽 정상에 이르는 코스를 가리키며 다시 앞장서서 걸었다. 깊이 101.4m나 되는 깔때기형의 분화구를 나선형으로 돌자면 30분 정도는 소요될 것이다.

서쪽 사면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양하 무더기가 아직도 순을 보이지 않은 채 마른 잎으로 누워 있다. 복수초는 당근 잎처럼 퍼져 끝에 조그만 열매를 달았고, 박새는 둥글고 큰 잎을 자랑한다. 일행 중에도 박새와 새우란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걸로 보아 할머니들이 캐다가 오일장에서 속여 파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말나리가 다가올 여름을 준비하고, 곳곳에 궁중에서 사약의 원료로 썼다는 천남성이 두루미처럼 꽃을 달고 서 있다. 노루귀는 꽃을 다 피워버리고 잎만 세 갈래로 편 채 축 늘어진 모습으로 오수를 즐긴다. 이렇듯 들꽃들은 자신의 등장할 때를 알고 저마다 주어진 역할을 다하며 자연의 질서를 지키고 있는데, 우리 인간이란?

산등성이에 이르러 삼나무 숲을 기다시피 지나서, 환히 트인 곳으로 나온다. 새로 솟기 시작한 비비추란을 모르고 누가 몇 개 뭉개놓았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나 할까, 아무래도 알았으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드디어 정상, 커다란 원형 경기장 같은 오름의 정경이 눈 안으로 들어오고 그 경치에 탄성이 절로 쏟아진다. 이 오름은 우리가 들어갔던 분화구 외에도 옆에 다른 분화구를 둘이나 더 갖고 있는 복합형 화산체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주봉을 중심으로 등허리를 돌아가며 여러 개의 크고 작은 봉우리가 어깨를 맞대어 하나의 커다란 산체를 이루고 있으며, 오름 정상에서는 멀리 한라산과 바다까지 조망할 수 있다.

큰 힘 안 들이고 올라와서 모두들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오늘 삼림욕 덕분으로 10년은 더 젊어졌다고 응원을 보내고 나서, 어른들을 대접하고자 배낭에 지고 온 막걸리와 소주 그리고 안주로 마련한 순대 등을 내놓았다. 한라산 정상을 뭉게구름이 감싸 안았을 뿐, 날씨가 맑다. 황사가 조금도 없는 맑은 하늘이다. 그러고 보니 왕이메는 이곳 벌판에 흩어져 있는 중심축이 되고 있다. 동북쪽으로 폭낭오름, 빈네오름, 북돌아진오름, 다래오름, 발이메까지. 남쪽으로 이돈이, 영아리, 돌오름, 마복이, 서쪽 능선 너머로 무악과 산방산, 모슬봉, 도너리, 남송이, 비양도. 북쪽으로 새별오름, 이달봉, 금오름…. 멀리 내 고향 마을의 과오름이 손짓한다.

▲ 산방산에서 다시 생각하는 ‘산방배작’과 용머리

비가 왔던 관계로 점심은 도시락이 아니라 바다가 환히 보이는 사계리 만미식당에서 해물탕을 대접했다. 이곳을 지날 적마다 점심 때 자주 먹는 편이지만 4인분 한 냄비에 3만원 하는 해물탕에는 제주에서 나는 소라를 비롯해서 오분작이 등 맛있는 해물이 가득 들어 있다. 여행하는 즐거움 중 하나는 그 고장의 이름난 음식을 먹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흡족한 일행은 부른 배를 쓸며, 오랜만에 산방굴사에 오르기로 한다. 옛날 사냥꾼이 한라산에서 사슴을 쏘다가 잘못해 그만 옥황상제의 궁둥이를 건드렸는데, 화가 난 옥황상제가 한라산 봉우리를 뽑아 던진 것이 날아와 산방산이 되었고, 그 뽑힌 곳이 백록담이 되었다는 전설이 깃든.

해발 395m의 산방산은 1천5백만년 전 제주섬에서 제일 먼저 솟아오른 곳이다. 그 중턱에 해식동굴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 그 증거이다. 어찌 보면 그곳에 해식동굴이 있다는 것 자체가 믿기지 않는다. 그러나, 그 앞에 있는 용머리에 가 보면 사암층의 그대로 드러나 풍화작용에 의해 기묘한 모양이 이루어진 것으로 증명이 된다. 산방덕이의 눈물이라는 약수를 의지하여 세운 산방굴사는 고려시대의 고승 혜일 대덕이 거처하던 기원정사였다고 알려졌다. 이 곳에서 내려다보는 해안 풍경은 영주 12경의 하나로 불릴 정도로 경치가 좋다.

멀리 바라다 보이는 가파도와 마라도, 그리고 형제섬을 앞에 두고 이형상 목사의 순력도에 나오는 그림을 본다. <탐라순력도>에 나오는 ‘산방배작(山房盃酌)’은 1702년(숙종 28) 11월 초10일 이형상 목사가 순력 도중 이곳을 지나다가 산방굴에 올라 고을 수령들과 한 잔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그림에는 송악산, 형제도, 군산, 감산, 용두 등이 표기되었고, 도로의 위치와 산방연대, 흑로포가 보인다. 자기들만 먹고 마시는 게 시샘이 나는지 화공 김남길은 이들을 마치 성낸 고래 입속에서 노는 것처럼 묘사하였다. 자세한 이야기는 본 칼럼 제3호 ‘산방산, 하늘로 오르는 신들의 계단’(2001. 1. 9.) 참조.

산방산 아래에 새로 복원해 놓은 산방연대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며, 옛 이야기를 들려준다. 산방연대는 1437(세종19)년 왜구의 침입에 대비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4. 3을 전후해 소실되었된 것을 몇 년 전에 복원했다. 동쪽으로 5.7㎞ 떨어진 당포연대(서귀포시 하예동 소재)와 서쪽으로 6㎞ 떨어진 무수연대(대정읍 하모리 소재)와 교신했었다. 제주읍성에서 서쪽으로 136리, 대정현성에서는 동쪽 10리에 해당하는 곳이다. 다른 연대와 마찬가지로 별장 6인, 연군(직군) 12명이 배속되어 별장 1인, 연군 2명이 1조로 한 달에 5일씩 망을 보았다.

▲ 하멜 기념비, 그리고 용머리해안과 화순해수욕장

하멜 표류 기념비는 산방연대 아래쪽에 위치해 있었다. 1980년 4월 1일 한국국제문화협회와 주한 네덜란드 대사관에 의해, 한국과 네덜란드간의 우호증진과 하멜 공덕의 증표로 세워졌다. 우리나라를 서방 세계에 최초로 알린 유럽인들은 1653년 8월 16일 제주도 부근해역에서 태풍으로 난파당하여 표류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선원들이었다. 핸드릭 하멜을 포함한 64명의 선원들을 태운 상선 스패로우 호크는 대만에서 일본 나가사키를 향하여 항해 도중, 대만해협에서 치명적인 폭풍을 만나 그 당시 대정현이었던 모슬포 부근에 상륙한 것으로 전해진다.

‘하멜 표류기’는 고국으로 돌아간 하멜이 쓴 책으로, 이 책에는 하멜과 그 일행이 일본으로 가던 도중 태풍을 만나서 제주도에 표류하게 된 사정과, 그 후 14년간의 억류 생활 중에 보고 들은 우리나라의 생활 모습, 그리고 1666년에 하멜이 7명의 동료와 함께 일본으로 탈출하기까지의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책은 우리나라 사정을 유럽에 소개한 최초의 책으로, 지리, 풍속, 정치, 군사, 교육, 교역 등에 대하여 자세히 기록하고 있어, 역으로 당시 우리나라의 사정을 아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라고나 할까?

용머리라는 이름은 언덕의 모양이 용이 머리를 들고 바다로 들어가는 모습을 닮았다하여 붙여진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용머리가 왕이 날 훌륭한 형세임을 안 진시황이 호종단을 보내어 용의 꼬리 부분과 잔등 부분의 맥을 칼로 끊어 버렸는데, 이때 피가 흘러내리고 산방산은 괴로운 울음을 며칠 째 계속했다고 한다. 산방산을 배경으로 가파도와 마라도, 형제섬이 보이는 화순해수욕장은 3만평의 검은 모래가 펼쳐져 있다. 특히 산방산 자락으로부터 흘러내리는 시원한 담수가 풍부하다. 화순해수욕장의 길이는 250m, 너비는 80m, 평균수심은 1.2m(경사도는 5도)이다.

수천만 년 동안 쌓여 이루어진 사암층인 용머리는 해안 절벽을 모진 파도가 때려서 만들어 놓은 것으로 오묘한 해안 절경을 보는 순간 누구나 감탄사를 연발하게 된다. 작은 방처럼 움푹 들어간 굴방이나 넓은 암벽의 침식 지대가 펼쳐져 장관을 이루고 있는 곳으로 요즘 들어 많은 관광객들에게 각광을 받고 있는 코스의 하나이다. 산방산 앞자락 바닷가에 위치해 있는데, 산방산 휴게소에서 10여분 걸어 내려가면 수려한 해안 절경의 용머리 해안과 마주치게 된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나 할까? 이 날은 파도 때문에 입장이 금지되어 있었다.

▲ 안덕계곡(安德溪谷)과 김광종 영세불망비

먼 옛날 하늘이 울고 땅이 진동하고 구름과 안개가 낀지 7일 만에 큰 산들이 일어서고 시냇물이 암벽 사이를 굽이굽이 흘러 안덕계곡이 이루어졌다. 계곡 양쪽 기슭에는 동백나무, 구실잣밤나무, 종가시나무, 생달나무, 후박나무, 참식나무 등의 고목들이 대낮에도 어두울 만큼 울창하며 10여m의 기암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다. 또한 그 사이사이를 맑고 시원한 물이 구비쳐 흐르며 이름처럼 안락하면서도 멋스러운 운치를 자아낸다. 입구에는 마을에서 옮겨온 서재선생 적려유허비가 서있다. 서제 임정하 선생은 1927년(영조1) 감산리에 위리안치 되었는데, 지방 유생과 자제를 모아 교육하였다. 그의 5대손 임헌대가 제주 목사로 있을 때 세운 것이다.

안덕계곡 매표소를 지나 계곡으로 약 60m쯤 내려가면 절벽 아래에 바위그늘집자리가 있다. 바위그늘이 트인 방향은 남서쪽이고, 높게 드리워진 바위그늘의 입구 직경은 11m에 이르며, 입구 높이는 2.5˜2.8m, 굴 입구에서 안쪽까지의 길이는 7m 정도이다. 바닥의 상태는 수평으로 고르게 평평하며, 토층의 두께는 대략 60˜110cm 정도로 예상된다. 보존 상태는 양호하다. 굴 내부에서 확인된 유물은 탐라시대 후기에 해당하는 두께 1cm 미만의 곽지2식 토기편이다. 거기서 30m 정도 동쪽에도 또 하나 있는데, 지금에라도 충분히 움막 대신 임시로 기거할 만하다.

김광종 영세불망비는 화순리 황개천 속칭 ‘도체비빌레’에 위치해 있다. 김광종은 한경면 저지리 사람으로 안덕면 화순리 황개천 바위를 뚫고 화순리 넓은 땅에 물을 끌어다 논밭을 만들어 논농사가 가능하도록 하였다. 즉, 1832년(순조32) 3월부터 1841년(헌종7) 9월까지 약 10년에 걸쳐, 황개천 바위를 뚫고 물을 끌어들여 1만여 평의 땅을 개척한 것이다. 그리고 이에 필요한 경비를 오직 자신의 재산으로 마련하였다. 이러한 그의 노고가 '중국 한나라의 소신(召信)의 선정과 비길 만하다' 하여 이민들이 그를 전조(田祖)로 모셔 제사 지내는 한편, 1938년 5월 화순리 답회가 후손들과 협의하여 비를 세운 것이다.

이 비석은 화순에서 동쪽으로 마을이 거의 끝나는 지점에서 오른쪽으로 꺾이는 골목으로 500여m 들어가서 계곡으로 내려가는 숲길 옆에 있다. 같은 내용의 비가 두 개 서 있는데, 좀 작은 비석은 1938년 세운 것이고, 큰 비석은 김광종의 후손들이 앞의 비석을 보완하기 위하여 1960년대(?)에 세운 것으로 '通政大夫金公光宗永世不忘碑(통정대부김광종영생불망비)'라고 되어 있고 한글로 행적을 소개하였다. 이 비석들이 있는 곳에서 계곡으로 내려가면 당시 수로 공사를 했던 흔적들을 볼 수 있다. 한 사람의 조건 없는 희생이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을 교훈으로 삼으며, 안덕면의 답사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2002. 4. 21.)

<사진> 위는 <탐라순력도> 중 '산방배작'의 일부분으로 이곳을 지나던 목사 일행이 고을 원님과 술 한 잔 마시는 그림이고, 아래 사진은 용머리와 산방산의 모습이다. 앞에 보이는 것은 해녀가 물질할 때 쓰는 부표(浮瓢)인 '태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