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향토문화 기행

새에 관한 명상 (4) 뻐꾸기

김창집 2002. 5. 28. 19:58

 

▲ 소리만 있고 그 실체가 궁금했던 새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워어즈워드(William Wordworth, 1770∼1850). 꿈 많던 시절 뻐꾸기 소리에 매료된 그는 그 새의 모습을 보기 위해 온 종일 산과 들을 헤맨다. 그러나, 새는 보이지 않고 '소리'만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 '소리'의 실체가 더 아름답게 상상되지 않았을까? 그는 그 소리를 가슴에 품고 살았다. 나이가 들어서도 그 소리만 들으면 가슴이 뛴다. 뻐꾸기 소리는 젊었을 적 그의 이상(理想)이었던 것이다. '뻐꾸기에 부쳐'에서 우리는 그를 만날 수 있다.

오, 유쾌한 새 손[客]이여!
예 듣고 지금 또 들으니
내 마음 기쁘다.
오, 뻐꾸기여!
내 너를 '새'라 부르랴,
헤매는 '소리'라 부르랴?

풀밭에 누워서
거푸 우는 네 소릴 듣는다.
멀고도 가까운 듯
이 산 저 산 옮아가는구나.

골짜기엔 한갓
햇빛과 꽃 얘기로 들릴 테지만
너는 내게 실어다 준다
꿈 많은 시절의 얘기를.

정말이지 잘 왔구나
봄의 귀염둥이!
상기도 너는 내게
새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
하나의 목소리요, 수수께끼.

학교시절에 귀 기울였던
바로 그 소리
숲 속과 나무와 하늘을
몇 번이고 바라보게 했던
바로 그 울음소리.

너를 찾으려
숲 속과 풀밭을
얼마나 헤매었던가
너는 여전히 내가 그리는
소망이요 사랑이었으나
끝내 보이지 않았다.

지금도 들판에 누워
네 소리에 귀 기울인다.
그 소리에 귀 기울일라치면
황금빛 옛 시절이 돌아온다.

오, 축복 받은 새여!
우리가 발 디딘
이 땅이 다시
꿈같은 선경처럼 보이는구나
네게 어울리는 집인 양!

내 어렸을 적도 그랬다. 세상이 온통 초록으로 변해 자연이 그 풍부한 혜택을 내릴 즈음, 소를 몰고 들로 나서 상동 따먹기에 정신 팔린 나의 영혼을 깨워줬던 소리! 차라리 그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오늘날은 온갖 매체가 발달되어 뻐꾸기의 사진을 흔하게 접할 수 있고, 다른 새의 둥지에서 알에서 깨어나 자라는 전 과정을 취재해서 보여주기까지 한다. 그래서 새에 대한 신비가 사라진 건 아닐까? 만약 워어즈워드가 이런 모습을 봤다면 이 같은 시가 나올 수 있었겠는가?

▲ 다른 둥지에서 알을 낳고 기르게 하는 여름철새

오늘 아침도 사라봉 산책에서 뻐꾸기 소리를 들었다. 5월 16일 처음 만난 뒤로 거의 매일 들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 혹시 여기다 둥지를 튼 건 아닐까? 뻐꾸기는 두견이목 두견이과에 속하는 새로, 따뜻한 아프리카나 동남아에서 겨울을 나고 날씨가 더워지기 시작하면 먹이가 풍부한 유럽과 아시아 전역으로 퍼져 번식을 꾀한 뒤 추워지면 다시 돌아간다. 우리가 흔히 뻐꾸기를 봄과 관련하여 생각하기 쉬운데, 이는 유럽 문화의 영향이다. 지중해의 따뜻한 기후는 새를 봄부터 이동하게 만드는 것이다.

뻐꾸기는 울창한 숲에는 잘 가지 않고 비교적 작은 숲을 좋아한다. 그런 곳에 그들의 먹이가 되는 나비, 딱정벌레, 메뚜기, 벌, 작은 포유류 등이 많이 살기 때문이다. 몸의 길이는 35cm 정도인데, 수컷의 겨울깃은 잿빛이며 아래가슴과 배는 흰색 바탕에 어두운 갈색의 가로띠, 나머지 부분은 잿빛이다. 암컷의 깃은 수컷과 비슷하나 갈색을 띠고 가슴과 아랫목에는 선명하지 못한 갈색의 가로띠가 나있다. 우리는 보통 우는소리가 다 같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수컷은 '뻐꾹, 뻐꾹' 하고 되풀이해서 울며, 때로는 그 전후에 격렬하게 '곽, 곽, 곽' 하고 운다. 암컷은, '뽀옷 삣, 빗, 삐이' 하고 울뿐이다.

뻐꾸기는 직접 둥지를 틀지 않고, 때까치, 쇠개개비, 촉새, 알락할미새 등의 둥지에 알을 낳아 그 새로 하여금 품고[抱卵] 기르게[育雛] 한다. 이런 것을 탁란(托卵)이라 하는데, 보통 1개의 둥지에 1개의 알을 위탁시키나 2∼3개의 알을 위탁시키는 예도 있다. 암컷이 가짜 어미 새 둥우리에 가서 알을 하나 부리로 밀어 떨어뜨린 뒤 대신 둥지 가장자리에 자기 알을 낳아 놓는다. 뻐꾸기 새끼는 다른 알보다 일찍 깨어나서 다른 알들을 모두 밖으로 밀어낸다. 설령 다른 새끼들이 알에서 깨어난다 하드라도 모두 둥지 밖으로 밀어내 버리고 혼자서 먹이를 독식한다. 뻐꾸기 새끼는 몸집이 매우 커서 기르는 어미 새보다도 더 크게 자란다.

우리는 흔히 '낳은 정'과 '기른 정'을 이야기한다. 과연 뻐꾸기는 자신의 힘으로 둥지를 틀고 알을 낳아 그것을 품고 알을 까서 날 수 있을 때까지 기를 수 있는 능력을 조물주로부터 부여받지 못했는지? 아니면, 후천적으로 게을러서 얌체 짓을 하는 건지? 그들도 종족보존을 위하여 자기 새끼를 보호하려는 모성 본능이 있을 것이다. 어렵사리 다른 새의 둥지를 찾아 때맞춰 알을 낳고, 새끼가 날 수 있을 때까지 지켜보는 마음은 오죽할까? 가슴 졸이며 둥지를 배회하면서도 선뜻 나서지 못하는 어미, 또 자신의 새끼들을 다 죽여버린 줄도 모르고 다른 새의 새끼를 열심히 기르는 다른 어미. 자연의 질서는 갈수록 신비하기만 하다.

▲ 강력한 메시지를 담은 영화 '뻐꾸기 둥지위로 날아간 새’

1976년 4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 감독, 각본, 남우주연, 남우조연 등 5개 부문에서 오스카를 수상한 작품. 작가 켄 키지의 장편소설을 밀로스 포먼 감독이 영화화한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One Flew Over the Cuckoo's Nest)'. 이 영화에서 맥머피 역을 맡은 잭 니콜슨은 자신이 맡은 역을 소화하기 위해 실제로 정신병원에서 생활하였다고 하며, 나오는 사람들은 오레곤 주립정신병원의 직원과 그 가족, 입원 중인 환자들이다. 이 작품은 할리우드 주류영화의 기본 공식에서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흥행과 비평 모두에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유명한 배우라고 해야 한 명밖에 나오지 않고, 당시만 해도 거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던 외국인 감독이 연출을 맡았으며, 암담한 결말과 씁쓸한 결말로 끝나는 이 영화의 성공 비결은 강렬한 스토리에서 기인한다. 이것은 결코 대적할 수 없을 것 같은 거대한 시스템에 홀로 맞서는 한 남자의 스토리이다. 시나리오는 주인공에 대한 관객의 감정이입을 강렬하게 충동한다. 그에 덧붙여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와 스태프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이 영화를 위대한 작품으로 만든 것이다.

이 영화는 표면적으로 미국의 어느 정신병원에서 일어나는 간호사와 환자들의 갈등과 일련의 사건들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이 정신병원은 단순한 이야기 전개의 무대를 넘어서 한 조직 내의 계급체계와, 그 체계를 유지하기 위해 구성된 물리적 구조와 심리적 규율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정신병자들의 밝은 세계와 대조적으로 체제가 만든 차가운 시설, 그리고 그것이 상징하는 건강한 사람들의 사회가 얼마나 부자유스러운 것인가를 그렸다. 정말로 병든 사람은 누구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영화이다.

결국 이 영화는 정신병자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근대 계급사회의 구조와 모순, 지배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기제들을 보여주는 영화이다. 점점 통제가 약화되고 자유가 확대된다고 하지만 '뻐꾸기 둥지위로 날아간 새'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과연 권력의 해체가 진행되고 있는가는 쉽게 단정지을 수 없는 문제이다. 이윤 극대화와 효율성을 목표로 조직 구성원들을 감시하고 평가하는 것이 현대의 기업조직이며, 그러한 조직과 사회의 권력에 구속된 것이 이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이 사회에서 정상인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은 '뻐꾸기 둥지위로 날아간 새'에 등장하는 환자들이 아닐까? '뻐꾸기(Cuckoo)'는 미국에서 속어로 "미치광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사진> 위는 뻐꾸기이고, 아래는 '뻐꾸기 둥지위로 날아간 새'의 영화 포스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