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향토문화 기행

제주의 미륵을 찾아서

김창집 2002. 8. 5. 23:37
▲ 그대 개심(改心)한 미륵불을 보았는가

삼복염천에 미륵(彌勒)을 찾아 나섰다. 돈이면 안 되는 것 없는 이 개명천지에 미륵불을 찾아 떠난다. 무슨 광영(光榮)을 바랄 일이 있다고 두 대의 버스에 82명이 나눠 타고, 우리 어린 중생을 구원해 줄, 아니 이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아 줄 미륵불을 찾아가는 길이다. 태풍이 지나간 자리, 뜨거운 하늘 아래서도 나무와 풀들은 저리도 푸르고, 그 속에 한낱 미물에 불과한 매미도 저렇게 즐겁게 노래하는데, 욕심 때문에 언제나 부족한 우리 인간들은 구원의 그늘을 찾아 기웃거리고 있는 것이다.

가슴팍을 열어 젖히고 들어오라 한다
세상은 온통 굳게 잠글 일 하나로 뻗쳐 있는데
이곳에선 부끄러움을 거울 삼아
오장육부 켜켜이 묵은 오물 건덕지
씻어내고 닦아내라 한다

가는 길 섶섶이 자주빛 칡꽃 냄새
염천도 아랑곳하지 않고 흐드러진다
돌고 돌아 저수지 지나 산문에 들어서니
등이 휘어버린 잔솔가지
수직으로 뻗어보려 합장하고
덩달아 마른 풀꽃들도
주름진 겉살 붙들고 나풀거린다

바깥은 아직도 어둡고 칙칙한데
풀과 나무들은 앞다투어 밝아진다
벽을 세우고 빗장을 채우는 것은
지극히 낯뜨거운 세상 속의 일
개심사 앞에서는 벌레 새끼 한 마리도
잠그거나 닫지 않는다
허허불상(處處佛像) 인사불성(人事不省) 나무아미타불

--- 문현미 「개심한 미륵불을 보았다」전문


▲ 우리 나라의 미륵신앙(彌勒信仰)

정세가 어지러웠던 후삼국 시대, 궁예는 자칭 미륵불이라 하여 흩어진 민심을 달콤한 소리로 결집하려 했다. 금관을 쓰고 화려한 가사를 만들어 입은 궁예는 맏아들과 둘째 아들을 협시보살로 삼았으며, 스스로 불경 20여 권을 만들고 미륵 관심법을 행한다는 등 허무맹랑한 소리로 무고한 대중을 괴롭혔다. 그의 지론에 의하면, 미륵이 석가와 함께 도를 닦을 때, 먼저 도를 이루는 자가 세상에 나아가 교를 펴고 다스리기로 하였는데, 무릎 위에 먼저 모란꽃을 피우는 자로 정하기로 했다. 석가가 거짓으로 잠든 척하고 미륵을 바라보니 무릎에서 꽃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에 석가는 도둑의 마음을 가지고 그 꽃을 꺾어 자기 무릎에 꽂았는데 미륵은 그것을 알고 석가에게 더럽다고 욕하면서 먼저 세상을 다스리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석가 시대에는 사람들이 도둑의 마음을 가지게 되었으며, 지금이야말로 미륵의 현신(現身)인 궁예 자신의 시대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원래 미륵 신앙은 미래의 부처인 미륵불이 현세에 나타나 고통과 죄악이 없는 광명된 세상(용화세계)를 이룬다는 불교 신앙의 한 형태이다. 즉, 먼 장래에 미륵불이 나타나 부처님이 미처 구제하지 못한 중생을 모두 구제할 것이며, 그 때에 이 세상은 낙토(樂土)로 변할 것이라는 신앙으로, 미래에 대한 유토피아적 이상향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하여 사회가 혼란하고 민심이 불안할 때 주로 세력을 폈다. 미륵 신앙은 후삼국 시대부터 유행하였으며,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에도 민간 신앙의 저변을 이루고 있었다. 조선 후기의 현실은 흉년, 질병, 재해 등으로 절망적이었고, 그리하여 민중들은 불안과 고통에 허덕이고 있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민중들은 자연히 이상 사회의 도래를 약속하는 미륵 신앙에 쉽게 빠져 들어갔다. 심지어 일부 무리는 살아 있는 미륵불을 자처하고, 광제창생(廣濟蒼生)을 내세우며 민심을 현혹하기에 이르렀다.

삼국 시대이래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 나라의 미륵신앙은 면면히 이어오면서 많은 영향을 끼쳤다. 우리 나라 지명이나 산 이름, 절 이름 등에 미륵, 용화, 도솔 등이 자주 쓰였던 것도, 각 절에 미륵불을 봉안한 미륵전이 흔한 것도, 상당수의 미륵불상이 전하여지고 있는 것도, 미륵신앙에 얽힌 설화가 민간에 널리 퍼진 것도 모두 미륵신앙의 영향이었다. 신라시대의 화랑과 미륵신앙이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었던 것은 분명 미륵신앙이 신라에 수용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한 특징이었다. 미륵신앙의 이상 세계를 신라사회에 구체적으로 역사화 시키고자 하였던 의도가 엿보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미래의 미륵이 출현하는 유토피아적 이상세계를 제시하고 있는 미륵신앙은 주로 하층민의 희망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 제주도의 미륵불을 찾아서

우리가 제주도의 신당(神堂)을 연구하여 박사 학위를 받은 문무병 선생의 안내로 먼저 찾아간 곳은 광령2리 마씨당 조상미륵이었다. 산천단 윗길 산록도로를 따라 한껏 푸르러진 숲과 들판을 가로질러 1100도로 나간다. 한밝저수지를 지나 원동으로 통하는 산록도로로 들어서서 1km쯤 가다가 광령계곡 상류에 이르렀다. 다리 양쪽으로 깊은 계곡의 경치가 예사스럽지 않다. 다리를 지나자마자 차를 세우고 북쪽 목장으로 들어섰는데, 가운데에 제법 큰 소나무 하나를 의지하여 나지막하게 돌로 울타리를 두른 신당(神堂)은 사스레피나무가 분위기를 조성하고 그 아래에 미륵을 닮은 자연석과 돌하르방을 세워 놓았다. 타다만 양초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근래에도 사람이 다녀갔음을 알 수 있었다. 이곳은 주로 아들 낳기를 소원하는 사람들이 찾는 곳으로, 한 때 마씨 성을 가진 분이 집을 지어 살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아기를 점지해 주었다고 한다.

다음은 시내로 내려와 용담동 속칭 한두기에 차를 세우고 절동산 용화사로 들어갔다. 이곳에는 높이 290cm의 큰 석상과 오른쪽으로 60cm쯤 되어 보이는 하얀 동자석이 서 있다. 큰 석상은 '자복(資福)' '복신미륵(福神彌勒)' '큰어른' 등으로 불리는데, 그 생김새가 특이할 뿐더러 제주 다공질 현무암으로 조각된 점이 특징이다. 건입동에 있는 동자복과 용담동의 서자복 둘 다 달걀형의 둥그스름하고 얌전한 얼굴에 벙거지 같은 감투를 쓰고 늠름하게 서 있다. 어느 것이나 다 형상과 조각 수법이 같은 것으로 보아 동시대의 작품임을 알 수 있으며, 신기한 것은 동자복과 서자복이 서로 마주 보며 제주읍성을 지켜왔다는 것이다. 남자의 성기 모양을 하고 있는 작은 석상은 아들 낳기를 기원하는 미륵불이다.

뒤 이어 찾아간 건입동 복신미륵은 개인 주택 뒤편 좁은 공간에 위치해 있는데, 이 자리는 만수사(萬壽寺)라는 절집이 있던 곳이며, 서미륵이 있는 자리는 해륜사(海輪寺)가 있던 곳이다. 이 두 사찰은 모두 고려시대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는데 절은 없어지고 그 곳에 세웠던 미륵불만 남은 것이다. 두 미륵은 민간에서 명복신(命福神)으로 숭배되고 있는데, 구체적으로는 그 기능이 조금씩 다르다. 동미륵은 집안의 제액(除厄)과 육아(育兒)에 특히 효험이 있다 하여 근처의 민간인들이 스스로 날을 봐서 제를 올린다. 한편 서자복은 해상어업의 안전과 풍어, 출타한 가족의 행운을 빌면 효험이 있다고 하여 근처의 주민들이 자주 찾는다. 두 미륵불은 지방민속자료 제1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다시 차를 돌려 동쪽으로 시가지를 벗어난다. 봉개동에서 16번도로로 접어들어 동회천동에다 차를 세우고 왼쪽으로 난 길을 걸어 들어갔다. 회천 샘터를 지나면 화천사가 나타나는데, 그 뒤뜰에 다섯 기의 석불이 나란히 서 있었다. 기자석(祈子石)인 이 석불들은 미륵이라 하지 않고 석불(石佛)이라고 부르는 점이 특이하다. 이 마을에서는 해마다 정월이면 이곳에서 마을의 안녕과 식구들의 건강을 기원하는 제를 올린다. 각기 모양이 다른 돌에다 현대 조각과 같은 특이한 얼굴을 새기고 있는데, 찾을 때마다 커다란 나무 줄기에 싱싱하게 붙어 자라는 콩짜개덩굴이 신비감을 더해준다. 사람들은 이를 콩란이라 말하는데, 콩짜개난과는 전혀 다른 식물이다. 비슷한 모습이지만 콩짜개난은 노란 꽃이 피는 난초과의 식물이고, 콩짜개덩굴은 꽃은 피지 않고 포자로 번식하는 고란초과의 식물이다.

도시락 점심 식사가 끝나자 일행은 바닷가로 내려와 서김녕리 서문하르방을 찾았다. 서문하르방은 어느 날 고기 낚으러 바다에 갔다. 백 발의 줄을 던지고 묵직한 것이 걸려 올려보니 커다란 돌멩이였다. 투덜대며 던져 버리고 나서 다시 한 참 동안 저어가서 줄을 던졌다가 올려보니 또 그 돌멩이였다. 셋째 번에도 여전히 같은 돌이 걸렸다. 자신과 인연이 있는 조상이라고 여긴 그는 그 돌을 모시고 왔다. 그 날 밤 꿈에 백발 노인이 나타나 "나는 미륵이다. 제주에 있는 어느 절에 모실 미륵불인데, 파선이 되어 건너가지 못하겠구나. 나를 잘 모시면 부귀영화를 시켜주겠다."고 하였다. 어부가 그 돌을 이곳에 모셨더니 큰 부자가 되었다. 이후 아기를 못 낳는 사람이 이곳에 찾아와 빌면, 사내아이를 낳게 하는 효험이 있다 한다. 확실히 무엇을 닮았다고 할 수 없는 모습의 작은 바위는 예덕나무를 배경으로 가운데 모셔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화북동 윤동지 영감이었다. 원래 이 미륵돌은 어느 집안의 조상신으로 모셨는데 그 때문에 큰 부자가 되었다. 그러던 중 자손들의 정성이 부족한 탓으로 아무렇게나 버려져 화북진성의 돌 틈에 끼게 되었다. 급기야 그 집안에 피부병이 돌았고, 식구들은 돌부처의 긁혀진 피부처럼 살갗이 아프고 망가진 코처럼 코가 헐었다. 그것을 알아차린 집안에서는 그 돌을 종이로 곱게 싸서 모시게 되는데 신통하게도 피부병이 다 낳았고 집안이 평안하였다 한다. 지금도 그곳에다 흰 종이로 싸서 모셔 놓았다. 이렇게 미륵은 어둠 속에 존재하고 있었다. 미륵은 병들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희망이다. 그러므로 민중이 염원하는 미륵은 석가의 시대가 끝난 다음에 찾아오는 미래불로서의 미륵이기보다는 끊임없이 소용돌이치는 험한 세상의 희망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2002. 8. 1.]


<사진> 위는 복신미륵의 하나인 용담동의 서자복이고(옆의 하얀 것이 기자석), 가운데는 콩짜개덩굴, 아래는 살아있는 미륵이라고 할 수 있는 천진난만한 동자승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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