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향토문화 기행

수눌음의 지혜

김창집 2002. 8. 14. 08:30
* 이 내용은 <제주문화예술> 가을호에 실릴 글입니다.

▲ 중국에 뒤지는 농산물 가격 경쟁력

요즘 어쩌다 농촌의 상가(喪家)나 잔치집을 가보면, 자주 목격되는 광경이 있다. 이웃집이나 골목에서 벌어지고 있는 윷놀이판이 그것이다. 마을 사람 들 중 그래도 일할 만한 남자 어른들이 수북히 모여 종지에서 뿌려지는 윷가락에 일희일비하며 투전판의 스릴을 즐기고 있다. 가운데 앉아서 말을 쓰고 있는 심판의 무릎 아래로 돌멩이에 지긋이 눌려 있는 배춧잎이 애처롭다. 어떤 때는 그것이 한 닢이 아니고 여러 닢이 뭉쳐 있을 때도 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밤을 새우기도 하고 사흘 내내 이어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요즘 수지를 맞출만한 농사가 없어 일할 의욕이 떨어졌다고 한다.

정말 할 일이 없는 것일까? 과거 우리 농촌에서는 저렇게 놀 틈이 없었다. 자급자족을 하던 시기여서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수지가 맞든 안 맞든 돈이 될 수 있는 작물을 모두 심어 틈나는 대로 가꾸고 거둬들였다. 정말 할 일이 없다 싶으면 주위를 살펴 남의 일이라도 도왔다. 몇 년 전 IMF를 맞아 모든 직장에서는 구조 조정이 이루어져 창의력이 없거나 부지런하지 못한 사람들은 일자리를 빼앗겼고, 변화를 모색하지 않고 무작정 지금까지 해오던 것을 답습하던 회사는 문을 닫아야만 했던 씁쓸한 기억을 우리는 갖고 있다. 이제 농촌도 그런 경우를 피할 수 없게 돼버렸다. 끊임없이 연구하고 부지런을 떨지 않으면 살아 남기 힘들다. 더구나 바로 옆에 땅도 넓고 인건비가 비교도 안될 만큼 싼 중국 대륙이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 수눌음의 지혜

'수눌음'은 제주어 '수눌다'의 명사형으로 본토의 '품앗이'에 대응될 수 있는 말이지만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는 시장의 원시 형태인 물물 교환의 개념에서 출발했다고 생각되는데, 너무도 다양하고 자연스럽기 때문에 제주만의 고유한 미풍양속으로 자리잡았었다. 그 이면에는 섬이라는 특이한 환경과 역사가 깔려 있다. 과거 대부분의 해변마을은 반농반어(半農半漁) 형태를 이루었기 때문에 배를 타야만 하는 남정네들이 풍랑을 만나 희생되는 경우가 많았고, 각종 군역(軍役)을 수행하면서 또 해방 후 4·3과 한국전쟁을 거치는 과정에서 상당수의 남자들이 희생이 되어 홀로 살아가는 여인들은 생계 유지를 위해 소규모일 망정 자신의 힘으로 밭농사를 지어야만 했다.

여자 혼자서 농사를 짓게 되는 경우 제일 곤혹스러운 일은 밭을 가는 일이었다. 이 때 수눌음이 제 기능을 발휘한다. 특히, 아낙네는 힘이 부쳐 황소를 기르기 힘들뿐만 아니라 밭가는 일은 반드시 남자가 하는 일로 여겼기 때문에 비교적 힘이 덜 드는 김매기라든지 소먹이인 촐(꼴)을 벨 때 며칠 도와주었다가 밭을 갈 때 도움을 받는 식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수눌음은 남정네가 할 수 있는 일이건 아낙네가 할 수 있는 일이건 구분이 없을 뿐더러 일이 종류, 이를테면 김매는 일이나 보리 베는 일 등 품을 파는 일이면 다 통하게 돼 있어서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식의 마련은 하지 않아도 좋았다. 그래서 대부분의 일은 1 : 1의 균형을 유지했고, 밭가는 일은 소가 한 몫 한다 하여 2일 또는 3일의 대가를 쳐주었다.


▲ 이웃과 더욱 가까워지는 계기

우리는 이웃과의 가까운 경우를 빗대어 '그 집의 숟가락 숫자까지 훤하다'라는 말로 나타낸다. 서로의 필요에 의해 수눌어 일을 하기 시작하면 일하는 시간은 거의 같이 지내게 마련이다. 김매는 경우 혼자서 하기 싫어서 하루는 이 집 밭, 하루는 저 집 밭 하는 식으로 같이 일하기를 즐긴다. 그럴 경우 하루종일 일을 하면서 노동의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노동요를 부르거나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누다 보면 자연스레 그 집안의 사정을 알게 되고 또 아침이나 점심을 같이 먹기 때문에 그 집의 식기며 숟가락 개수까지 꿸 수가 있는 것이다. 그 지경에 이르면 혼자서 일을 하기가 정말 싫어진다. 그 넓은 밭에서 혼자서 하루종일 일을 한다고 생각해 보라. 외롭고 지루하여 몇 번씩 일어서서 사방을 둘러보다 보면 일의 능률은 떨어지고 피로가 쌓여 졸음이 쏟아지기도 한다.

이웃과의 왕래가 적어지면 정보에 어두워지고 점점 외톨이가 되어간다. 그래서 자신이 크게 바쁘지 않을 때는 자청하여 일을 찾아 나서기도 한다. 신문과 방송이 제 역할을 못하던 시절 일터는 비중이 큰 정보 채널이었던 것이다. 더욱이 농사일에 관해서는 직접 실습을 하는 과정에서 재배 방법을 쉽게 터득할 수 있는 장점도 있다. 그러면서 이웃간의 정은 더욱 돈독해져 식게(제사)떡도 나눠 먹게 되고 무슨 일이 있으면 의논하며 어려운 일이 생기면 자신의 일인 양 발 벗고 나서게 되는 것이다. 그 때는 이웃이 아니라 한 가족이 되어 어려운 일까지 동참하게 된다.


▲ 노동력의 저축 수단인 수눌음

10년 전 중국 여행 중 팔달령에 있는 만리장성에 올라 혼자 하염없이 걸으며 엉뚱한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성을 쌓을 당시 강제 동원된 사람들의 겪은 고통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고 또 많은 희생을 치렀다고 전해지지만 그 덕에 지금의 많은 후손들은 그를 활용하여 먹고산다는 것을 생각하면, 태평성대에 매일 배를 두드리며 먹고 마시기만 할 것이 아니라 얼마간의 시간을 후손들을 위해 어떤 기념비적인 커다란 공사를 해두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이른바 노동력의 축적인 셈인데 이집트의 피라미드 역시 나일강이 말라 농사를 지을 수 없는 건기(乾期)에 일꾼들을 놀고 먹일 수가 없어서 쌓게 했다는 것이 거의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

지금 제주도는 귤이나 특용 작물 재배가 주농이기 때문에 농한기가 생기고, 반대로 농번기 때면 일손이 턱없이 부족하게 되어 품삯이 올라가기 때문에 수지를 맞출 수 없다 야단이지만 과거 척박한 땅을 가진 제주도는 농한기가 따로 없었다. 우리 집인 경우에도 농사 지을 땅은 적은 데다 식구는 많고 다른 수입원이 없어서 돈이 되는 일이면 무엇이든 일을 만들어 하지 않으면 안되었었다. 가을걷이가 끝나 갈무리를 마치는 대로 고망각단(남이 수확하고 난 곳에서 이삭을 줍는 식으로 베어온 초가집 줄 놓는 재료)을 해다 남의 집 지붕을 맡아 일었고, 보리 벵작(배메기; 땅 임자와 소작하는 사람이 소출을 똑 같이 가르는 제도)이든 새밭 이기는(띠밭을 개간하는) 일이든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래서 한겨울에 보리 검질(김) 매는 일이 끝이 없었고, 농한기라는 이른봄에도 새밭을 이기는 일을 했다.


▲ 농사의 적기를 맞추고 능률을 올리기도

우리 역군님덜 촐 비여난 홍애기를 ?殆ʼn㈃求?
어허어허어어어 홍애기로구나
두렴두려어험 에헤어허어허아아야 어허어야 방아 홍애기로고낭아
우리 역군님더얼 다덜 잘 비어줍서 홍애기로구나
어기여차 지치덜 말곡 촐을 비어달라니라 어허어허야 홍아기로구나

꼴 벨 때 불리는 노동요 '홍애기' 소리다. 드넓은 목초지에 여러 사람이 모여 신나게 노래를 불러가며 꼴을 베는 모습은 보기도 좋거니와 능률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농사일은 시기를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파종을 하는 일이나 김을 매는 일, 다른 작물을 거두어들이는 일 등은 조금 여유를 가질 수 있으나, 보리베기나 꼴베기의 경우는 날씨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미리 수눌어 두었다가 최적기를 택해 한꺼번에 벰으로써 성공적으로 말려 알찬 수확을 거두게 되는 것이다. 특히, 밭 밟는 일 같은 경우는 혼자서 하는 것보다 여럿이 해야 일의 상승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요즘 농촌은 갈수록 힘들어지고 있다. 과다 생산으로 판로 문제가 걱정되고 시설비에 비료, 농약대 그리고 인건비 때문에 수지 타산이 안 맞는다고 울상이다. 이럴 때 어떤 형태로든 수눌음의 지혜를 빌릴 수는 없을까? 그리고, 현대인들이 어떤 농산물을 선호하는지도 알아보고 지역의 토질과 기후에 알맞으면서도 농약과 금비(金肥) 없이도 재배 가능한 작목을 개발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선인들이 그랬듯이 틈나는 대로 수눌음 형태의 일을 했다가 필요할 때 빌어 씀으로써 인건비를 줄여서 가격 경쟁력을 거들어야 하지 않을까.


[사진] 위는 요즘 한창 피어나기 시작한 쥐손이풀(일명 이질풀)이고, 가운데는 여럿이서 김매는 모습, 아래는 한라산과 나무입니다.








'향토문화 기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체오름과 코끼리랜드  (0) 2002.12.10
바람 부는 날 성산읍 관내 답사기  (0) 2002.10.28
제주의 미륵을 찾아서  (0) 2002.08.05
강을 낳고 바람을 길러  (0) 2002.07.11
새에 관한 명상 (4) 뻐꾸기  (0) 2002.0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