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국내 나들이

35년만의 나들이(3)

김창집 2005. 6. 19. 07:44

* 지성친목회 완도, 해남, 강진 여행기 (2005. 6. 5.∼6.)

 


 

* 멀리 떨어진 곳에 세워진 두륜산 대둔사 일주문

 

♧ 대흥사 마을에서 보낸 하룻밤

 

 번갈아 가며 샤워를 한 후 불을 끈 뒤 TV만 켜고 누웠으나 쉽게 잠이 들 리 없었다. "방만 있었더라면 짝을 지어 들여놓을 걸." 하고 독백하듯 내뱉었더니, "30여 년 동안 같이 잤는데 여기까지 와서 같이 자란 말이냐?"며 정색한다. 하긴 다섯 남자가 한 곳으로 머리를 하고 누우니 방이 가득하다. 천성인 것처럼 벽 쪽에 자리를 잡고 돌아눕자마자 코를 골기 시작하는 놈을 보며 나머지 네 남자가 웃는다.    

 

 저 녀석은 고향 마을의 신용협동조합 상무로 정년을 맞아 별로 쉬지도 못해 고향에 봉사하라고 늦게 마을 이장을 씌웠는데, 초등학교 총동창회장까지 같이 둘러쓰고 말았다. 마을 일 신경 쓰랴 농사지으랴 술 마시랴 무척 고단했나 보다. 30년 전, 병으로 쓸개를 잘라버리고 나서도 경우 바르게 할 말 하고, 술도 잘 마신다. 우리 모임에서 제일 많이 마셔도 끄떡없다. 아니 취한 모습을 못 보았다. 요즘 걱정이라면 나이 들어가는 큰아들 장가 못 보내 걱정이랄까?


 


 

 * 절 가까운 곳에 세워진 두륜산 대흥사 일주문

 

 오늘 술도 안 마시고 오후 내내 렌터카 운전한 개인 택시 기사 아저씨도 피곤해 잠이 들었는지 말이 없다. 작년에 어떤 실수를 저질렀는지 부인과 냉랭한 분위기로 요즘 근신 중이다. 이번 기회에 만회를 시켜줘야 하는데 아직까지는 좋은 조짐을 보인다. 요즘 딸 손자들 놓고 재미가 쏠쏠한 모양인데, 아이들 때문이라도 별 일은 없겠지. 갈등의 원인은 제거되었는지 오늘 보니 부인이 한층 명랑해졌다.      

 

 나머지 두 녀석은 부인 건강이 걱정이다. 개인택시 하다가 떡방앗간 하는 녀석이나 농사를 짓다가 이삿짐 센터 하는 놈이나 젊어서 죽으라고 고생해서 이제 아이들 걱정도 덜고 먹고 살만 하니까 부인이 덜컥 큰 병이다. 하나 더 있다. 여기 오지 못한 녀석도 농사와 장사로 고생하며 돈은 벌었는데, 부인의 건강이 말이 아니다. 밖에서 노크를 해서 문을 열었더니 세 아줌씨가 서있다. 한 여인이 코를 너무 골아 같이 못 자겠다고 차에서 자겠다고 차키를 달란다.

 


 

* 일주문 안 오른쪽에 있는 부도밭의 일부

 

♣ 언제 와봐도 좋은 대둔사

 

 말을 하다가 잠잠하기에 나도 깜빡 잠이 들었다. 두런거리는 소리가 나서 깨었더니, 뭐가 있는지 몸이 가려워 깨었다면서 샤워를 하고 새벽 산책을 나간다고 부산스럽다. 둘이 나간 후 옆 친구가 잠이 안 오는지 TV를 켜 OCN을 돌렸는데, '베로니카 2030'이다. 그런데 하는 장면만 나오다가 딱 좋을 때 화면이 바뀌는 것이 감질이 나는지 뚝 꺼버린다. 다시 깜빡 잠이 들었다 깨어보니, 새벽 창이 희뿌옇게 밝아 오고 있었다. 꼭 세 꼭지 잤는데도 몸은 가뿐하다. 아무래도 여럿이 다니는 여행 체질인가 보다.

 

 가볍게 세수 겸 물을 끼얹고 카메라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둘은 절까지 갔는지 아직도 안 보이고, 오늘도 안개가 잔뜩 끼어 일출 사진과 풍경 사진을 기대하기는 글렀다. 이번 여행을 떠나면서 일체의 욕심은 버리려고 했다. 그 동안 사람들을 데리고 답사 다니면서 참 무모할 정도로 빽빽한 스케줄로 뛰어다니다 보니, 사색(思索)할 겨를이 없었다. 안개가 섬을 가로  막을 때부터 섬과는 인연이 없다는 걸 느꼈다. 오늘 아침 이 두륜산과 일출과도 인연이 없나보다. 아직 꽃을 찍을 정도로 밝지 못해서 그냥 슬슬 거닐어 본다.

 


 

* 해탈문 안에 모셔놓은 불상과 그림

 

 공기가 맑고 깨끗한 것이 이곳 대흥사는 언제 와봐도 좋다. 결혼 20주년 기념일이 방학이어서 집사람과 와서 하룻밤 묵은 기억이 새롭다. 그 날은 아침 새벽에 손을 호호 불어가면서 절까지 걸어 다녀왔다. 대흥사(大興寺)는 원래 대둔사(大芚寺)였는데, 일제강점기에 강제로 대흥사로 바뀌었다가 1993년에 다시 대둔사란 이름을 찾았는데, 아직도 대흥사라는 이름을 같이 쓰고 있다. 멀리 있는 일주문엔 대둔사로, 가까이 있는 일주문엔 대흥사로 현판이 돼 있어 혼란을 준다.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두륜산(頭輪山), 아니 대둔산(大芚山)에 있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지금은 이곳이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나 왕벚나무 자생지가 있을 정도로 주변 경관이 수려하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22교구의 본사로 426년 신라의 승려 정관(淨觀)이 창건한 만일암(挽日庵)에서 출발했다고도 하고, 544년(진흥왕 5)에 아도(阿道)가 창건했다고도 한다. 일설에 508년(무열왕 8)에 이름이 전하지 않는 비구승이 중창(重創)했다는 설 등이 있으나 모두 확인할 길이 없다. 그 후 역사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임진왜란 이전까지 이렇다 할 규모를 갖추지 못하였던 것 같다.

 


 

* 1899년에 불타 다시 지은 대둔사 대웅보전

 

♧ 조선시대 많은 대강사와 대종사 배출

 

 이 절은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西山大師)가 거느린 승군의 총본영이 있던 곳으로 유명하다. 난리가 끝난 1604년(선조 37), 서산이 자신의 의발(衣鉢)을 이 곳에 전한 후부터 크게 중창되었다고 한다. 그 후 1665년(현종6) 심수(心粹)가 대웅전을 중창하고, 1669년에는 표충사(表忠祠)를 건립하였다. 1813년에는 불에 타버렸던 천불전이 재건되는 등 조선시대에는 억불의 탄압 속에서도 많은 인재를 길러내어 의심(義諶), 삼우(三遇), 도안(道安), 문신(文信), 추붕(秋鵬) 같은 13인의 대종사(大宗師)와 원오(圓悟), 광열(廣悅), 영우(永愚) 등 13인의 대강사(大講師)를 배출시킨 명찰이 되었다.

 

 경내에는 대웅보전, 침계루(枕溪樓), 명부전, 나한전, 백설당, 천불전, 용화당(龍華堂), 도서각, 표충사, 서원, 서산대사 기념관, 대광명전, 만일암 등 많은 당우가 있으며, 보물로 지정된 응진전전 3층석탑, 북미륵암(北彌勒庵) 3층석탑,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 등이 있다. 또한 서산대사를 비롯한 여러 명승의 부도와 탑이 있으며, 특히 서산대사의 유물과 이광사(李匡師), 김정희(金正喜), 이삼만(李三晩) 등 역대 명필들의 필적으로 된 각종 현판도 남아 있다.


 


 

* 조선시대 명필 이광사가 쓴 대웅보전 현판

 

 또 이 절에 오면 일지암(一枝庵)과 초의선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초의선사는 무안 출신으로 1786년에 나서 1866년에 입적한 13대종사의 한 분이다.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던 우리나라의 다도(茶道)를 중흥시켰기에 감히 다성(茶聖)으로 부른다. 또, 초의선사는 불문에 몸담고 있지만 유학, 도교 등 당시의 여러 지식을 습득하여 다산 정약용이나 추사 김정희, 자하 신위 같은 학자나 사대부들과 폭넓게 사귀었다.

 

 초의선사가 지은 '동다송(東茶頌)'은 차의 효능과 산지에 따른 품질, 만들고 마시는 법 등을 적은 것으로 차에 관한 우리나라 최초의 책이며, 우리나라 차를 예찬하고 있다. 24세 연상인 다산 정약용을 스승으로 모셨고, 동갑인 추사 김정희와는 유불(儒佛)의 경계를 넘어 친구로서의 정을 나누었는데, 학문과 예술 그리고 차향을 나누었다. 초의선사는 귀양중인 추사를 만나러 제주도를 다녀올 만큼 절친한 사이었다.

 


 

*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에 귀양 가면서 썼다는 무량수각 현판

 

♣ 부도밭을 지나 해탈문으로   

 

 6시에 절로 출발하기로 했는데 아줌씨들의 행보가 늦다. 차에서 주무신 분들이 이제야 세수를 하고 있는 중이라 한다. 나는 가다가 사진을 찍겠다고 말하고는 하룻밤을 보낸 동일장 온천장을 나왔다. 눈앞에 날카로운 산봉우리가 우뚝 서 있다. 어제 몇 차례 보면서 찍지 못했던 병꽃을 실컷 찍었다. 정말 아름다운 꽃이다. 찍고 나서 앞밭을 보니, 다른 들꽃이 보인다. 들어가 보니 엉겅퀴를 비롯한 어성초, 딱지꽃 등이 피어 있었다.

 

 길가로 막 나왔을 때 차가 도착하여 타고 일주문을 통과했다. 원래 절집은 일주문으로부터 걸어 들어가면서 불심을 가지고 기원하는 마음이 되어야 하는데, 일행 중 잘 걷지 못하는 부인이 있어 걷는 분들의 눈총을 받으며 새로 만든 일주문께에 차를 세우고 거기서부터 걸어들어 갔다. 청아한 기운이 엄습하며 오른쪽으로 늘어서 있는 수많은 부도의 무리가 눈앞으로 다가선다.

 


 

* 웅진전 앞에 있는 보물 제320호 삼층석탑

 

 서산대사를 비롯해서 이곳 대둔사에서 배출된 역대 종사와 강사 스님들의 부도와 부도비가 나지막한 울타리 안에 가지런히 서 있다. 불교계에서는 손꼽히는 분들이지만 나 자신도 서산대사와 초의선사 밖에 아는 분이 없다. 부도에 대해서는 저들도 익히 아는 바이기 때문에 간단히 말하고 초의선사에 대해서는 자세히 설명했다. 10여년 전 여름에 처음으로 이곳에 들렀을 때 엊그제 북한에 가서 그곳 노래를 불러 일부 사람들에게 욕을 먹고 있는 유홍준 청장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읽고 초의선사가 거처하던 일지암까지 땀흘리며 걸어갔던 생각이 난다.

 

 해탈문(解脫門)은 보통 불이문(不二門)이라고도 하는데, 진리는 둘이 아니라는 뜻에서 유래한다. 이 문을 본당에 들어서는 곳에 세운 것은 이곳을 통과해야만 진리의 세계인 불국토에 들어갈 수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부처와 중생이 다르지 않고, 생과 사, 만남과 이별 역시 그 근원은 모두 하나이다. 이 같은 불이(不二)의 뜻을 알게 되면 해탈할 수 있으므로 해탈문이라고도 한다.
 


 

* 해탈문 안에서 보이는 아름다운 주변 풍경


♧ 특이한 구조를 지닌 절

 

 보통은 해탈문을 지나면 절 마당이 나타나는데, 이곳은 그렇지 않다. 다시 좀 떨어진 곳으로 돌담이 둘러진 건물들만 보인다. 이 절은 규모가 커서 전체가 네 구역으로 나뉘어 돌담을 둘러쌓았기 때문에 따로 독립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금당천을 경계로 대웅보전이 있는 북원과 천불전이 있는 남원으로 나뉘고, 다시 남원 뒤편에 서산대사의 사당인 표충사와 대광명전 구역으로 나뉜다.

 

 왼쪽 골목으로 들어가 다리를 건너 대웅보전 마당으로 들어갔다. 아주머니들은 누구랄 것 없이 천 원짜리 지폐 몇 장씩을 겹쳐 쥐고 대웅보전으로 들어간다. 이 건물은 1899년에 불타버린 곳에 다시 지은 것인데, 현판은 원교 이광사의 글씨다. 추사 김정희가 1840년에 제주도로 귀양가던 길에 초의선사를 만나기 위해 들렀다 촌스러운 글씨를 보고 떼 내라고 했다가 햇수로 9년 만에 돌아오면서 찾아 걸어놓으라고 했다는 글씨이다.



 

* 대웅보전 앞 화단에 심어놓은 특이한 단풍나무

 

 

 왼쪽 나지막한 무량수각(無量壽閣)의 현판은 귀양갈 때 추사가 쓴 글씨라 한다. 글씨를 다시 한 번 보고 나서 사진을 찍고 얼른 웅진전 앞에 있는 보물 제320호 삼층석탑으로 갔다. 응진전은 지금 수리를 하느라 얼기설기 얽혀 있고, 그 앞의 삼층석탑은 이 절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신라 석탑의 전형 양식을 따르고 있다한다. 이 절에는 보물 제48호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과 제301호 북미륵암 삼층석탑이 있는데, 이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두륜산 정상 바로 밑 암자에 있다. 9년 전이던가 오름 팀과 왔을 때 정상까지 등정하면서 가본 적이 있다.

 

 천불전을 돌아보고 나오는데 걷기 불편한 아줌마들이 나가자는 얼굴을 해서 천천히 걸어서 나왔다. 하다 못해 표충사와 서산대사 유물전시관에 들러 보물 제88호 탑산사 동종이라도 들러볼까 하다가 이미 여러 차례 본 바가 있고, 이 팀은 유적 답사와 거리가 멀기 때문에 보조를 같이 하였다. 걸어나오면서 수려한 도립공원의 나무들과 냇물이 어울림을 보고는 모두들 좋아하여 이 곳으로 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하였다. (계속)    

 


 

* 나오다 찍은 대흥사 진입로 표지석

 

♬ You are my sunsh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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