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국내 나들이

35년만의 나들이(2)

김창집 2005. 6. 15. 16:38

* 지성친목회 완도, 해남, 강진 여행기 (2005. 6. 5.∼6.)

 


 

* 해신 촬영지의 배들

 

▲ 스쳐 지나간 땅끝, 사자봉

 

 참고로 제주 ↔ 완도간 한일 카페리 2등 객실(3등실은 없고 손님끼리 같이 누워 뒹구는 곳) 승선 요금은 일반이 18,000원이다. 섬 남쪽에 있는 해신 촬영 세트장인 신라방을 나와 서쪽 해안 일주도로로 완도와 해남군 남창을 연결하는 다리까지 오는 동안 늘어선 차량은 우리 일행의 행복한 여정을 말해주는 것 같아 모두들 기분이 좋아졌다. 남의 불행을 고소해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두세 시간 기다려도 해지기 전에 닿을까 말까한 그들에 비해 동쪽으로 쉽게 갈 수 있었던 데서 나온 안도감이다.

 

 그러나 우리도 얼마 안 가 어두운 그림자가 비치기 시작했다. 남창에서 땅끝 마을까지 가는 동안은 정말 신나는 디스코 메들리에 맞춰 콧노래가 나왔는데, 밀리는 차를 보고 나서부터는 마냥 신날 수만은 없어 음악을 끄고 의견을 들었다. 아니 들었다기보다는 나의 주장을 얘기했다. 여기서 이걸 보고 나면 해가 저물 판이니, 가다가 대신 미황사에 들리자고 했다. 아직도 정정한 남자 동창들뿐이었으면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 식으로라도 후닥닥 올라가 망루에 올라 주위를 한 번 쳐다보고 오겠지만 건강치 못한 아줌씨들을 염려해 한 말이다.

 


 

* 땅끝 마을의 사자봉 풍경

 

 차를 어디 가서 세우고 빼는데 들 시간을 생각해서 앞차를 따라 천천히 가면서 이곳을 소개했다. 천천히 고개를 넘는 동안 거북선 같이 생긴 건물을 보면서 신기해했다. 따지고 보면 육지로 봐서 땅끝이지 우리나라 국토로 치면 더 남쪽 끝에서 온 우리들이 아닌가? 맨 처음 내가 이곳에 왔을 때는 한여름 점심을 곧 먹은 뒤였다. 허위허위 올라가 사자봉 끝에서 토말비 사진을 찍고 나자 더워서 아무도 토말탑으로 내려가지 않으려 했다.  

 

 당시 나는 지방의 어느 월간지에 답사기를 쓰고 있을 때였는데 토말탑을 안 보고 그 느낌을 썼다가는 거짓말하는 꼴이 되기 때문에 당당히 가서 사진을 찍고 온다고 일행에게 말하고는 뛰어 내려갔다. 마침 한 신혼 부부가 있길래 토말탑을 배경을 둘러보며 사진을 찍고 올라오는데 더워서 견딜 수 없었다. 천천히 걸으며 수종(樹種)도 파악하고 매미 소리도 들으며 올라와 보니 아무도 없었다. 결국 더운데 차에서 기다리게 했다고 입이 부어 있는 일행들에게 아이스크림 하나씩 물리고 나서야 입을 막을 수 있었다.

 

 해남군 송지면에 위치한 땅끝마을은 말 그대로 한반도의 땅 끝에 위치한다 하여 얻은 이름이다. 122m의 사자봉 아래 형성된 마을인데, 사자봉의 전망대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면 다도해와, 날이 좋으면 제주도 한라산까지도 보인다. 육당(六堂)의 '조선상식문답'에는 '땅 끝에서 서울까지 천 리, 서울에서 북쪽 땅끝 온성까지 2천 리를 헤아려 삼천리강산'이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당시 우리는 다른 곳을 구경하다가 마지막 날 이곳에서 배를 타고 보길도에 들어갔었다.

 


 

* 해신 촬영지의 세트장에서

 

△ 달마산 배경이 멋스런 미황사
 
 땅끝을 안 들르고 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그곳을 빠져나가면서 다시금 느꼈다. 연휴를 맞아 계속 몰려드는 차들은 해신(海神) 촬영지 못지 않았다. 송호 해수욕장 너머로 둥둥 떠있는 안개 속 섬들을 바라보며 송지에 이르자 아줌씨들이 뜬금없이 수박이 먹고 싶다고 해서 평상이 있는 마트 옆에 차를 세우고 만 6천 원짜리 수박을 사서 차판과 칼을 빌려 깨놓고 실컷 먹었다. 얼마나 크고 맛있었는지 아홉이서 먹다 남았다.    

 

 미황사(美黃寺)는 해남군 송지면 서정리 달마산 중턱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의 말사(末寺)이다. 서기 749년인 신라 경덕왕 8년에 의조(義照)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는데, 사적기에 따르면 금인(金人)이 인도에서 돌배를 타고 가져온 불상과 경전을 금강산에 모시려고 하였으나, 이미 많은 절이 있어 되돌아가던 중 이곳이 인연의 땅임을 알고, 의조에게 경전과 불상을 소에 싣고 가다가 소가 멈추는 곳에 절을 짓고 봉안하라 일렀다고 한다. 


 

* 미황사 입구의 상록수 숲

 

 이에 의조는 금인의 말대로 경전과 불상을 소에 싣고 가다가 소가 크게 울고 누웠다가 일어난 곳에 통교사를 창건하고 마지막 멈춘 곳에 미황사를 지었는데, 소의 울음소리가 지극히 아름다워 '미(美)'자와 금인(金人)을 상징한 '황(黃)'자를 썼다 한다. 그 뒤 수백 년 동안의 기록은 나타나 있지 않은데, 1597년(선조30) 정유재란으로 절이 소실되어 1598년에 만선(晩善)이 중건하였고, 1660년(현종1) 성간(省侃)이 중창하였으며, 1754년(영조 30)에는 덕수가 다시 중창하였다. 우리나라 육지의 최남단에 있는 사찰로 경내에는 대웅전(보물 947), 응진당(보물 1183)과 명부전, 달마전, 칠성각, 만하당, 세심당 등이 있다. 

 

 잘 걷지 못하는 환자가 타고 있어 될 수 있는 대로 가까이 가려고 심한 비탈길을 올라 절이 보이는 곳에 이르러 보니, 절 앞을 파내고 고르는 작업이 한창이다. 그 전에 꼬불꼬불 돌아 올라가는 것도 꽤 운치가 있었는데, 이렇게 헤집어 놓으니 눈에 거슬린다. 대웅전 앞 화단에 어성초를 찍고 나서 오랜만에 만난 대웅전의 배흘림기둥을 만져보고 합장한 채로 그곳을 지나 다시 하나의 보물인 조그마한 현판의 응진전을 보고 돌아 나왔다. 울창한 숲 속 달마산의 병풍바위를 두르고 서 있는 미황사는 언제나 이름처럼 아름답다.

 


 

* 달마산의 바위를 배경으로 앉아 있는 미황사 보물 제947호 대웅보전

 

▲ 방 구하러 이곳저곳으로

 

 생각 같아서는 녹우당(綠雨堂)에 들러 고풍스런 집이나 동국진체의 원조로 일컬어지는 옥동 이서의 물 흐르듯 쓴 현판 글씨와 꾸짓듯이 눈을 부라리고 있는 국보 제240호의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을 오랜만에 보고 싶었으나 시간도 그렇거니와 그것들을 이해해 줄 것 같지 않은 친구들을 생각해서 꾹 참고, 이르지만 대둔사(大芚寺) 민박촌으로 가서 방도 잡고 저녁이나 느긋하게 먹기로 했다.

 

 절에서 나온 우리는 월송으로 나와 남창으로 갔다가 813번 도로를 통해 신월에서 왼쪽 827번 도로로 해남읍내 쪽으로 가다가 신기에서 다시 왼쪽으로 돌아 대둔사로 들어갔다. 곳곳에 있는 도로 표지판엔 아직도 대흥사(大興寺)로 표기되어 있다. 입구 거의 들어서서 나중에 알았지만 병꽃을 보았고, 여관과 장급 호텔들이 있는 곳에 가서 제일 좋아 보이는 집으로 가서 방이 있느냐고 물었으나 없었다. 더운 밥 찬 밥 가릴 처지가 아니라 생각하고 묵은 집에 가서 물어보아도 역시 없다는 대답이다.

 

 


 

* 보물 1183호 미황사 응진전

 

 황금 연휴에 무슨 방이 남아 있겠느냐 반문하는 집도 있었다. 할 수 없이 동쪽에 새로 호텔을 짓고 있는 곳으로 가서 물어보았으나 허탕이다. 방을 잡은 축들은 자투리 시간을 이용하여 새로 생긴 케이블카를 탄다고 길게 줄을 섰다. 들어오는 곳에나 가보는 수밖에 없다고 차를 돌려 나오는데 마침 산과 산 사이로 해가 곱게 지고 있었으나, 전신주와 전깃줄이 걸려 사진을 찍을 수 없어 재촉하였으나 전신주를 벗어났을 때는 이미 늦어 구름 속에 반쯤 잠긴 해나마 감사하게 찍었다.

 

 밤에 자면서 우리를 그 지는 해에 비유하고는 이제 그 해가 지듯 순간적으로 늙어갈 것이라고 말했더니 기분이 이상한지 아무 대답을 않는다. 언제 나이를 그렇게 먹어버렸는지 어렵게 살아온 친구들의 얼굴엔 주름살이 더욱 깊어 보인다. 그래도 차에서는 손주 자랑으로 입에 침이 마르지 않더니, 자신들의 늙는 것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물레방아가 있는 첫집에 물었더니, 5명 정도 잘 수 있는 방 하나가 있다 하나 남녀가 유별한데 어쩔 수 없어 어디 좀 떨어진 곳이라도 소개해 달랬더니, 변두리를 가르쳐 주어 그곳에서 방 2개를 얻어 나누어 잤다.

 


 

* 미황사에 있는 얼굴만 남은 불상

 

 

△ 두륜가든에서 먹은 3시간의 저녁

 

 방에 짐을 두고 나와 무엇을 먹을까 의논하는데, 고향 마을에서 이장 노릇 하는 친구 녀석이 낮에 회만 먹어 속이 허하다고 육식(肉食)을 하자고 한다. 지금 이 절 동네까지 와서 무슨 육식이냐고 이곳에서 버섯전골이나 산채 정식을 하자고 했더니, 모두들 성에 안 차는 모양이다. 그럼 장어탕이나 메기탕을 시켜서 소주도 마시자 했더니 좋다고 해서 주인 아저씨에게 물어 마을 너머에 있는 두륜가든을 소개 받았다. 

 

 물어물어 찾는데 동네 사람들이 누구나 잘 아는 것으로 보아 음식 맛이 괜찮은 모양이다. 차를 세우다 다시 병꽃을 만났다. 오래된 음식점인데 수조에는 민물장어와 메기, 그리고 자라들이 있었다. 메뉴판에는 용봉탕과 토종닭도 있다. 한참 의논해서 아줌씨들 중 환자가 있기 때문에 메기탕으로, 남자들은 메기가 크지 않다고 토종닭을 시켰다. 동네 사람들이 단체로 와서 회식을 하는 통에 우리가 시킨 것은 자꾸 늦어졌다.  

 


 

* 방 구하러 다니다 겨우 잡은 일몰

 

 길가에서 조금 떨어졌는데도 여기저기 먼지가 쌓이고 남자가 없다고 방 천장엔 거미줄이 여기저기 걸려 있다. 배고프다고 야단하니까 밑반찬을 가져다 주는데, 완두콩 삶은 것이 맛있다. 음식 솜씨가 좋은지 배고파서 그런지 모든 반찬이 맛있다고 해서 마음이 놓였다. 기다리다 지친 남자들은 소주를 시켜 마셨다. 한참 기다린 끝에 커다란 뚝배기 그릇에 메기탕이 나왔다. 역시 여자들이 마음이라 자기 짝에게 떠주느라 정신이 없다. 

 

 싱글인 나에게는 여기저기서 건더기가 들어왔다. 소주 안주에 딱 알맞다고 술잔 돌리는 속도가 빨라진다. 아줌씨들의 식사가 끝날 때까지 우리 토종닭은 안 들어오더니 재촉하고 나서야 먼저 모래주머니 날 것과 가슴살에 양파를 놓고 맵질하게 무친 것을 갖다 주었는데, 술안주론 그만이다. 두 가지로 시킨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삶은 닭이 나오자 이번에는 아줌씨들에게 덜어주고 녹두를 넣은 닭죽을 먹고 나니, 10시반. 이제 다른 곳에 술 마시러 가자고 할 시간은 이미 지나있었다. (계속)      

 


* 문제의 아름다운 병꽃


♬ Silver Lake Garden/New Age Tetaek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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