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신탐라순력도

신탐라순력도(4) 별방조점(別防操點)

김창집 2002. 10. 1. 00:57

* 이 글은 제주시정소식지에 실렸던 내용입니다.

 

 

* 탐라순력도 중 '별방조점'

  

▲ 가는 날이 장날, <세화민속오일시장>

우리가 별방진성을 찾아 떠난 날은 제15호 태풍 '루사'가 제주섬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 8월 30일 아침이었다. 더위가 한풀 꺾였는지 코스모스가 피어 제 모습을 드러내고, 으아리와 사위질빵이 하얀 꽃무더기를 안고 있다. 우리 나라 당근의 주 생산지인 구좌읍 일대의 밭은 어느덧 초록빛으로 메워졌다. 저것이 태풍을 이기고 꿋꿋이 자라서 제값 받을 수 있기를 기원해 본다.

일주도로변 김녕사굴 입구엔 일붕 서경보(一鵬 徐京保) 스님의 동상이 서있다. 당시 목사 일행이 별방진으로 가다 저 모습을 보았더라면 어떠했을까? 숭유억불정책의 충실한 신봉자였던 이 목사라면 당장에 부숴 버리라는 엄명을 내렸을 것이다. 그러나, 일붕 스님이 어떤 분인가? '죽음은 소멸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는 진리를 깨닫고 세계 초대 법왕으로 등극한 일붕선교종 종정이 아니신가. 300년의 세월은 종교와 사상까지도 바꾸어 놓았다.

해안도로로 가기 위해 세화리로 접어드는데 사람들이 복작댄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오늘이 5일, 10일 서는 세화장날이다. 태풍경보가 내려 파도가 하늘과 통하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데도 불구하고 장이 섰다. 차를 세우고 펄럭이는 휘장 속으로 들어선다. 야채가게엔 고구마로부터 감자, 호박, 무, 양배추, 배추, 양파, 고추, 오이, 깻잎, 상추, 고구마순, 마늘쫑 등 야채류가 다 모였다. 추석이 가까워 오는지 양하간이 나와 고운 빛을 발하고 있다.

 

                                             * 새로 복원된 별방진성의 일부

 

다음은 어물전. 어제 날이 궂었기 때문에 고기는 물이 안 좋다. 전갱이와 조기가 한 쟁반에 5천원, 멸갈치 도막 낸 것은 두 쟁반에 5천원이다. 생 고등어와 간 고등어, 생 우럭과 마른 우럭, 아귀도 5천원 단위로 팔고 있다. 북태평양에서 잡아온 냉동 오징어는 5마리에 3천원, 남태평양산 오징어는 한치로 둔갑했다. 돔 종류와 상어도 물이 가기는 마찬가지다.

5일장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의류전, 신발가게, 먹거리판, 곡물전, 약재상, 노래 테이프 가게, 낫과 칼 등속을 파는 대장간 가게, 가축전 등의 차일이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활기차게 펄럭인다. 뭐니뭐니 해도 5일장의 백미는 먹거리판이다. 태양포목점과 은성식당 앞에 자리한 순대집으로 들어섰다. 장 구경 왔다 한 잔 하는 사람도 있고, 아침을 걸렀는지 국수 그릇을 비우는 사람도 있다. 막걸리 한 병을 시켰더니, 안주로 순대와 내장을 내놓는다. 시장 인심은 그대로다. 바다에 면한 길에 차를 세워 놓고 하우스 감귤을 팔고 있는 것이 보인다. 파도가 언제 밀려 닥칠지 모르는 그곳의 위태한 상황이 꼭 제주 감귤의 현주소를 보는 것 같다.


▲ 별방진성을 안고 있는 구좌읍 하도리(下道里)

하도리는 제주시에서 동쪽으로 약40km 지점, 한라산 정상 백록담을 기준으로 정동쪽에 위치하여 동남쪽에 종달리, 서쪽에 세화리, 남서쪽에 상도리, 북쪽은 바다에 면해 있다. 한라산으로부터 가장 먼 거리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지형이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어, 2,510필지 4,407,722㎡나 되는 넓은 경작지를 갖고 있다. 동쪽 지미봉으로 시작하여 월산봉, 은월봉, 월랑봉, 둔지봉 등이 부채살 형태로 마을을 둘러싼 형국이다.

 

 

                                   * 성안에 옹기종기 들어앉은 하도리 마을촌 


마을 홈페이지에는, 1999년 6월말 기준으로 전체 779세대에 마을 인구는 2,374명으로 나와 있다. 눈부시게 푸른 바다와 하얀 백사장, 뛰어난 절경의 해안도로, 수십 종의 철새가 사시사철 쉬어 가는 도래지가 있다고 자랑한다. 또한 도내 어느 마을보다도 긴 해안을 끼고 있는데, 연안은 굴곡이 심하고 수심이 얕아 지역 특산물로 전복, 소라, 오분자기, 해삼, 문어, 성게, 톳, 우뭇가사리 같은 해산물이 생산되며, 이를 많이 먹어서인지 장수마을로도 알려져 있다.

별방조점의 그림을 보면. 좌가연대(左可烟臺)를 돌아 하도의탄리(下道衣灘里) 마을로 입성하는 목사 일행과 성 둘레에 군기를 걸어놓고 도열해 있는 성정군의 모습이 보인다. 취락 구조는 성 동쪽 바닷가를 제외하고 곳곳에 민가가 위치해 있어 마치 인가가 진성을 안고 있는 모습이다. 남쪽 다랑쉬오름이 마을의 안산격으로 떡 버티고 그 앞으로 황자장 목장이 마둔(馬屯)과 흑우둔(黑牛屯)으로 나뉘어져 있다. 왼쪽 용항포(龍項浦) 끝을 경계로 제주목(濟州牧)과 정의현(旌義縣)을 확연히 구분해 놓았다.


▲ 보존(保存)과 복원(復元)이 대조를 보이는 별방진성

해안도로를 통하여 하도리에 도착, 서쪽에 남아 있는 성으로 가보았다. 성문과 성루는 알 수 없으나 옹성(甕城)과 그에 이어진 부분이 제법 튼실하게 남아 있다. 성 굽은 커다란 돌을 사용하였으나 위로 올라갈수록 돌이 작아지고 더러 떨어져 버렸는지 둥그스름하다. 성이 이 정도라도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송악을 비롯한 계요등, 댕댕이덩굴, 머루 줄이 엉켜 있는 것이 한 몫 거든 것 같다. 성 위에는 환삼덩굴, 왕모시풀, 보리밥나무와 찔레 등 나무와 풀이 우거져 있다.

 

 

                                                 * 성문 앞 하도리 포구


별방조점은 성에서의 군사훈련과 성정군 및 군기와 우마를 점검하는 그림이다. 당시 성정군의 규모는 423명으로 화북성의 규모와 같다. 황자장의 우마수는 검은소 247수, 말 946필이며, 목자와 보인은 합쳐서 187명이다. 별방진 내에 위치한 동창에 보관되어 있는 곡식은 2,860여 석이었다. 지금 제주도 기념물 제24호로 지정된 별방진성은 원래 둘레가 2,390자, 높이 7자로 중종 5년(1510)에 장림(張琳) 목사가 왜선이 우도에 댈 때 가까이서 방어하려고 성을 쌓고 김녕방호소까지 옮겨 놓은 곳이다.

별방진성은 지금 하도포구에서 동쪽으로 일부 복원되어 있고, 동문이 있었다고 추정되는 곳에는 민가가 있어 그곳을 건너뛰어 남문 자리까지 이어놓았다. 복원된 성 위에 올라 걸어보니, 남아 있는 성과 분위기가 영 딴판이다. 아무래도 검증을 착실하게 하지 못한 것 같다. 그리고, 막혀 있어야 할 곳인 성 북쪽편을 마을에서 포구로 통하는 길 때문에 문처럼 터놓았다. 또, 해안도로를 내면서 그랬는진 몰라도 성안에 있어야 할 샘이 성밖으로 나와 있다. 지금은 메워져 있으나 그림을 보면 성을 통해 바닷물이 그냥 들어오게 되어 있다. 어떻게 쌓아서 바닷물을 밑으로 통하게 했었는지 궁금하다. 다만, 성 안 바다의 끝 부분으로 추정되는 좁은 땅에 갈대가 남아 부는 바람에 서걱이고 있었다.

 

 

                                  * 바다 가까이 있는 새로 복원된 성의 일부